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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번의 손길, 비로소 빛나다
2017-02-08 2017년 2월호
수만 번의 손길, 비로소 빛나다
글 /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 사진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명장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오묘한 빛
임충휴(71) 명장의 작업장에 들어서자 옻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리를 굽혀가며 가구에 자개 작업을 하는 그의 손끝은 온통 새까맸다. 손톱과 손가락 살점이 만나는 곳마다 모두 옻칠이 가득 끼어 있었다. “매일 작업을 하니까 손 상태가 이래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손톱에 때 꼈다며 더럽다고 흉보겠지만, 이래 봬도 대한민국이 인정한 손이자 내 밥벌이예요. 그나저나 옻 안 탑니까? 나중에 피부가 빨갛게 오르면서 가려울 수도 있어요. 우리야 항상 옻칠을 하는 사람들이라 괜찮은데….”
학이 날아오르고 꽃이 피어나는 생동감 속에 자연의 생명력이 꿈틀대는 십장생 장롱이 장생불사(長生不死)를 기원하고, 강물 위에 배 띄우고 유람하는 선유도가 그려진 장롱을 보면 가구가 아닌 현실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까만 바탕 위에 형형색색으로 펼쳐진 나전과 옻칠의 향연은 말로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은은하면서도 화려하고, 고아한 기품에 옻칠 고유의 냄새까지 어우러진 칠기는 예로부터 사랑 받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칠기는 한민족 역사와 함께 한 전통공예입니다. 특히 옻칠의 유익함을 일찍 깨닫고 생활에 접목한 선조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죠. 요즘 옻칠의 효능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어요. 수백 년 전에 침몰한 배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도 다 옻칠 덕분이거든요. 최근 웰빙이 트렌드가 되면서 천연 재료인 옻칠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건조를 열(熱)이 아닌 습(濕)으로 하는 것도 우리 전통 칠기의 특징이라고 한다. 23도 정도의 온도와 높은 습도가 유지되는 건조실에서 2~3시간 살짝 건조한 뒤에 다시 연마와 칠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배고파 시작한 ‘옻칠’이 ‘천직’이 되다
전남 완도가 고향인 임 명장은 4남 2녀 중 넷째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홀로 시작한 타향살이는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신문팔이, 구두닦이를 하다가 잠시 공장에서도 일했지만, 앞날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전통칠기공예 기술을 배우면서부터였다. 당시 나이 15세였다.
“어릴 적 고향 바닷가에서 갖고 놀던 전복 껍데기가 영롱한 빛을 내면서 나전칠기 제품으로 변하는 게 어찌나 신기하든지 옻칠이 내 살길이다 싶었죠.”
배를 곯지 않으려면 기술이 있어야한다는 말에 무작정 시작한 칠기공예였지만, 선배들이 기술을 가르쳐주기보다 심부름꾼으로 여겨 잔심부름하기에 바빴다. 어린 나이에 고생을 가리지 않고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내는 그를 눈여겨 본 스승은 3년이 지나자 조금씩 기술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임 명장은 그 모든 기술을 완벽하게 배우기까지 15년이 걸렸다고 한다.
자기만의 독립된 작업장을 차린 게 28세 무렵이었다. 이 명장의 솜씨는 1980년대 당시 삼성종합건설이 쿠웨이트 영빈관에 선물로 줄 자개병풍을 만들어 달라고 할 정도로 입소문을 탔다.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던 그의 ‘옻칠’도 1978년 2차 유류 파동으로 인한 업계 불황과 1997년 IMF사태로 큰 위기를 맞았다. “18살 때 저와 함께 일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열세 명 이었는데, 지금은 이 일을 계속하는 사람이 나까지 두 명입니다. 그만큼 힘든 일이지요.” 그중 3명은 30년째 칠기 일을 하다가 IMF 때 그만 두었지만, 그런 그들을 말릴 수 없었다. 생계가 되지 않는 일을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강요할 수가 없었다고.

‘인내’로 인정받은 대한민국 명장
“저라고 그만두고 싶은 적이 왜 없었겠어요. IMF때도 그랬고…. 하지만 어릴 적에 아버님이 써주신 ‘인내’라는 글자가 저를 붙잡아줬습니다.”
나전칠기 제작 공정은 기본 25가지가 넘는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수만 번의 손길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보통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넘게 걸리기도 한다. 그야말로 ‘인내’ 끝에 탄생하는 작품인 것이다.
시대는 바뀌었는데 옛날 방식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그를 미련하다고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다. 손이 많이 가는 전통 기법을 고수해서는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명분 있는 이유를 들어가며, 딱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직한 그는 백골(나무틀)에 칠을 바르고 그 위에 삼베를 발라 제작하는 전통 기법을 지키고 있다.
옻칠을 바르고 말리고, 벗겨내는 수많은 작업 과정과 수백 번, 수만 번의 손길 따라 황홀한 풍경을 그려내는 나전칠기. 첨단시대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전통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임 명장은 철저히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나전칠기의 생명은 칠에 있습니다. 삼베 입힌 것은 열두서너 번, 나뭇결을 살리는 투명 옻칠은 스무 번 정도 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편법이나 대충이라는 단어가 통하지 않는다.
이런 고집스러움 덕분에 그는 2004년 11월 칠기공예 분야 대한민국 명장이 되었다. 또 제28회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등을 수상한 것은 물론, 대한민국명장회로부터 최우수 명장으로 위촉받는 등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경원재 연회장에 설치된 작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임 명장이 인천에 자리 잡은 건 한 가구 업체로부터 나전칠기 비법 전수를 요청받으면서다. 업체와의 협업을 통해 나전칠기의 새로운 경쟁력을 확인한 그는 2012년 서구로 공방을 옮기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친환경 가구를 선호하는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인 만큼 ‘옻칠’로 만들어지는 나전칠기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의 명품 가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최고의 인프라를 가진 인천에서는 나전칠기를 비롯한 우리 전통 공예의 세계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고 수준 공항과 크루즈항을 연계해 전문적인 공예촌을 만들고 판매장과 체험장을 설치한다면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세계화에 대한 포부 외에도 그는 후진 양성과 대중화를 위한 노력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남부기술교육원 등을 통해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옻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전칠기를 알리고 있다.
“기회가 닿는다면 인천 지역에서도 문화 교실 등을 통해 재능 기부를 하고 싶어요. 어릴 적 상경했을 때 인천 라이터 공장에서 일했던 적이 있어요. 그땐 인천극장에서 영화도 종종 보곤 했는데, 낯설지 않은 인천이 이제 제 남은 삶의 터전이죠.”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가장 큰 자부심이라는 임충휴 명장. 나전칠기로 세계를 품는 그의 희망이 그의 작품처럼 화려하게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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