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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새 학기, 그 아름다운 시작

2017-03-03 2017년 3월호



봄, 새 학기, 그 아름다운 시작

‘all_ways_Incheon’ 모든 길은 인천으로 통한다.
110여 년 전 항구를 열고, 철도의 역사를 시작한 인천으로부터 길은 시작됐다.
대한민국의 땅 길, 바닷길을 넘어 세계로 향하는 새로운 하늘 길의 시작도 인천이었다.
그 길 위에 서서 인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본다.
그 세 번째 길을 따라, 우리 아이들이 새 미래를 만들어 가는 110여 년 역사 품은 학교를 찾았다.

글/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류창현 포토디렉터



조선인들의 땀으로 지은 창영초등학교 옛 교사


창영초등학교 가는 길


3월, 아지랑이 피듯 떠오르는 기억

스치는 바람이 한결 부드럽고 햇살은 따스하다. 순간순간 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살갗으로 느낀다. 이맘때면 기억 저편에서 아스라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던 지난날의 학창 시절이다. 두근두근, 세상을 향한 첫걸음. 아빠는 열심히 공부 하라며 용돈을 두둑이 챙겨주고, 엄마는 새 옷과 새 가방을 정성스레 마련해 주셨다. 선생님과 친구들을 처음 만나는 입학식 날엔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여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네모반듯한 학교 건물, 흙먼지 풀풀 날리며 친구들과 뛰놀던 운동장, 보물창고 같던 학교 앞 구멍가게는 어떻게 됐을까….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가 된 학교는 지금 많이도 변했
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맑은 눈동자의 아이들이 더 큰 미래를 향해 꿈을 키우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우리나라가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면서 전국 곳곳에 공립초등학교가 생겨났다. 민간 사업가가 세운 민족학교, 선교사가 지은 미션스쿨도 문을 열었다. 개항의 역사를 품은 인천에는 오래된 학교가 많다. 그중에서도 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근대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던 창영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증측으로 인해 독특한 구조를 띈 창영초등학교 옛 교사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세운 학교

1883년 1월, 제물포항이 열리면서 세상은 바뀌었다. 인천의 바닷길을 따라 새로운 문물이 쏟아지고 파란 눈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인천으로 온 외국인들이 산 좋고 물 좋은 응봉산 부
근에 터를 잡으면서, 조선인들은 지금의 창영동 주변으로 떠밀려 와야 했다. 1899년 경인선이 놓이면서 철도 북쪽 조계지 일대는 북촌, 남쪽 조선인 마을은 남촌으로 자연스레 선이 그어졌다. 남촌 주민들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며 힘겹게 삶을 일궈야 했다. 아이들의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인이 살던 지역에는 일본인 아이들을 교육하는 ‘아사히 소학교(현 신흥초등학교)’가 개항 바로 다음 해인 1884년 세워졌다. 하지만 그 후로 20여 년간 조선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었다.
이에 교육을 열망하는 남촌 주민들이 하나둘 일어나 학교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학교가 1907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 학교로 역사를 시작한 ‘창영초등학교’다. 교문을 들어서자 붉은 벽돌로 촘촘히 세운 2층 건물이 반갑게 맞아준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건재한 이 교사(校舍)는, 당시 남촌 사람들이 정성껏 모은 성금 2만 원으로 1922년 세웠다.
1920~30년대 학교 건축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에서는 고풍이 흐른다. 일자형의 단정한 몸체, 벽 윗부분은 화강석으로 우아한 아치형을 이루고 홍예석으로 만든 현관은 근세 양식을 띤 무지개 모양이다. 외벽은 널따란 창이 규칙적이고, 지붕에는 지붕 아랫방을 밝히기 위한 별도의 창이 근사하게 나 있다.


창영초등학교 내 3.1운동 기념비


창영초등학교 옛 교사 내 역사관


3·1운동을 이끈, 열 살 소년들

때마침 옛 학교 건물을 보수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희뿌연 먼지를 뚫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나무로 된 복도가 길게 이어진다. 요즘 학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가 끊기고 세월의 먼지만 자욱이 쌓여가던 건물은 특별교실과 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인천의 첫 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해 굴곡의 세월을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그 옛날 학생들의 닳고 닳은 손때 스민 책을 매만지며 지난시간을 헤아려본다.
“학교 예산을 활용해 자체적으로 운영하다 보니 환경이 열악해요. 그래도 오늘을 사는 아이들에게 학교 역사는 물론 한국 근현대사를 알릴 수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린 학생들이지만 모교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창영초등학교 차인철 교감은 지나간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학생들이 기특하고 고맙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운 학교였다. 학생들은 조선인의 손으로 직접 세운 학교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컸다.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3·1운동의 불을 지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학생들은 3·1운동 소식을 듣고 동맹 휴학을 결정했다. 거리로 나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만세 운동을 했다. 그들은 민족의 자존심이고 희망이었다.
학교에서 나가는 길, 햇살 드리운 운동장에서 야구부 학생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어린 친구들이지만 제법 진지하고 열심이다. 저마다 마음속에 ‘제2의 류현진’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있을 것이다. 고귀한 역사의 배움터에는, 오늘의 아이들이 더 큰 미래를 꿈꾸며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었다.





봄 햇살 같은 ‘우리의 미래들’

길모퉁이를 돌아 바로 옆 영화초등학교로 향했다. 이 학교는 인천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미국 여선교사 마가렛 벵겔(Magaret J. Bengel)이 여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웠다. 그녀는 1891년 스물둘 꽃다운 나이에 선교를 위해 낯선 이국땅으로 왔다. 당시 내리교회에 있는 한국인 전도사의 딸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영화초등학교의 출발이다.
처음 싸리재에 있던 학교는 1911년 지금의 자리에 3층 벽돌집 교사(校舍)를 마련해 이전했다. 여성 신도들이 빨래와 삯바느질로 모은 헌금과 기부금으로 정성스레 건물을 올렸다. 일반적
인 학교와 달리 영국 성공회 교회풍으로 지은 건물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멋이 흐른다. 열쇠를 돌려 묵직한 나무 문을 여는 순간, 시간은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색다른 빛깔을 띤다. 보통 학교에서 보는 일자형이 아닌 ‘ㅁ’자형구조로 깊숙하여 아늑하고 고요한 맛을 풍긴다. 2층은 교실로, 3층 다락방은 예배실로 쓰였다. 영화초등학교는 당시 인천의 여학생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오후 햇살의 농도가 달라지고 있다. 어느덧 수업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옛 학교 건물 바로 옆 본관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까르르 봄 햇살 같은 웃음소리,
아이들이 한참을 운동장에서 뛰놀다 하나둘 노란 버스를 타고 교문 밖으로 멀어져 간다. 희미해져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소망을 품어본다. 어제의 역사가 단단히 뿌리내린 이 땅에서, 오늘 우리 아이들이 더 밝고 희망찬 새 역사를 만들어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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