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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낯선 이름, 전도관
이제는 낯선 이름, 전도관
드론 촬영 / 홍승훈 자유사진가
글 · 사진 / 유동현 본지 편집장
송도국제도시가 들어 서기 전 인천은 ‘저층’ 도시였다.
구월동 씨티은행 경인본부(옛 경기은행 본점)를 제외하곤 20층 넘는 빌딩이 없었다. 산(山) 외에는 시야를 막는 건축물이나 구조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숭의동 전도관은 예외였다. 언덕 위에 길게 놓인 전도관은 비록
3층짜리였지만 인천 시민에게 ‘웅장한’ 건축물로 기억된다.
신흥 종교의 신비감과 상대적으로 납작 엎드린 주변 가옥 때문에 어느
건축물보다 크게 다가왔다. 실제로 인천 앞바다 섬에서 항구로 들어올 때,
지금은 사라진 선인체육관과 더불어 전도관의 자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전도관은 한 시대 인천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전도관이 들어앉은 ‘숭의동 109번지’는 드세고 거칠었던 동네로 유명했다. 바로 옆의 쇠뿔고개, 황골 등 이름만큼이나 터프한 땅을 닮았다는 설과 산등성이에 솥단지를 건 피란민들의 비탈지고 거친 삶 때문이라는 설이 맞선다. 이 때문에 창영동, 송림동 등 아랫동네 아이들은 그곳에 함부로 오르지 못했고 일부러 빙 둘러 갈 때도 지레 오금이 저렸다.
민둥산이었지만 조망 하나는 조선 팔도에 이만한 데가 없었다. 1897년경 당시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이 쇠뿔고개 정상에 여름 별장 용도로 2층 벽돌 건물을 지었다. 반구형의 돔을 곁들인 별장이었다. 창문을 열면 인천 앞바다 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어 바다에서 밀려 온 신선한 바람이 실내에 가득했다.
게다가 알렌의 별장은 ‘초역세권’이었다. 그는 경인선 부설권을 딴 미국인 모오스의 ‘빽’ 역할을 했다. 그 댓가로 1899년 개통한 경인선 노선이 별장 아래로
지나게끔 ‘특혜’ 설계됐다. 언덕 아래에 우각리역이 들어섰다. 오로지 알렌 한 사람만을 위한 역이었다. 그가 타고내리지 않으면 기차는 정차하지 않았다. 물론 역사(驛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자리는 지금의 진로아파트 아래 부근이다. 이러저런 이유 때문인지 경인철도
1차 기공식은 그의 별장 아래 쇠뿔고개 부근에서 거행됐다.
알렌 이후 그곳의 주인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1927년에는 이화여전 출신
이순희 남매가 그곳에 흔히들 ‘개미학원’이라고 불렀던 계명학원을 세웠다.
광복 직후에는 서울의 한 대학 분교가 개교하기도 했다.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는 ‘공사 집’ ‘선교사 집’으로 불리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1957년 10월 전도관을 세웠다. 한동안 ‘전도관’은 건물 이름이자 종교 단체명으로 불렸고,
나아가 동네 이름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전도관’ 건물 자체가 아이돌(우상)인 듯했다.
납작 엎드린 수많은 집들은 전도관을 가운데 두고 숭배하듯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이제 인천 사람들은 물론 지리(지명)에 밝다는 택시 기사들에게도 낯선 이름이 됐다.
전도관 아래 벌판에 거대한 ‘비행접시’ UFO 한 대가 착륙했다.
2012년 지하 3층, 지상 5층 규모의 축구전용경기장이 들어섰다.
원래 이 자리에는 인천 시민이 ‘그라운동장’이라고 불렀던
인천공설운동장이 있었다. 1934년 건립된 공설운동장은
세 차례 전국체전과 한 차례 소년체전 등 스포츠는 물론 경축,
환영, 규탄 등 각종 대중 집회와 행사 등이 열렸던 장소로
시민의 애환이 담긴 공간이다. 현재 이곳은 인천 연고 프로축구팀
인천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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