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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씨의 솜씨

2017-04-04 2017년 4월호



글/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류창현 포토디렉터

    


붉은 꽃처럼 화려한 차이나타운. 하지만 그 안엔 굴곡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인천의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따라 들어온 상공 화교(商工華僑)들로부터 그 역사를 시작한다. 이후 1883년 인천항이 열리면서 중국 조계(租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1920년대 산둥성 일대에 대홍수가 나면서 본격적으로 몰려들었다. 인천은 산둥성에서 아주 가까웠다. 중국 사람들에게 살기 좋다고 소문이 나면서 너도나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하지만 세상은 낯선 이방인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화교들은 북성동과 신포동 일대에 상권을 이루며 번성했지만, 급변하는 정치 상황과 정부의 외국인 제한 정책에 힘겹게 버티다 국적을 바꾸거나 하나둘 한국을 떠났다. 그들이 어두운 과거를 뒤로하고 옛 영광을 찾기 시작한 건,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부터다.
굴곡지고 파란 많은 흐름 속에서 살아온 세월. 하지만 지금 차이나타운은, 한국과 중국의 문화가 어우러진 관광 명소로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친다.
인천화교협회에 의하면 현재 인천에 뿌리내린 화교들은 2015년 기준 3천6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요리사, 재단사, 이발사 등 칼이나 가위를 만지는 일을 하며 대를 잇고 삶을 이었다. 솜.씨. 그들은 대부분 ‘손을 놀려 무엇을 만들거나 어떤 일을 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우리나라에서 곡(曲) 씨는 중국 당나라에서 귀화한 성씨로, 통계청의 ‘2015 인구 주택 총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단 115명에 불과한 희귀 성씨다. 중국 본토에서 온 인천의 곡 씨들을 만났다. 우연이었을까. 그들은 구두를 만들고 과자를 굽고 요리를 하며, 대륙으로부터 대대손손 이어온 솜.씨.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어둠 속 단단한, 망치소리
신포시장 ‘중국 양화점’







‘양화점 대신 짜장면 집을 했으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신발을 만들던 소년은 요릿집을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중구 신포동 화교 중에서 구두를 만드는 집은 곡(曲) 씨 네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빈손으로 중국 산둥성에서 인천으로 와 여덟 남매를 키웠다. 리어카를 끌며 야채 장사를 하고 남의 집 허드렛일도 했다. 배가 고팠다. 망치를 두드리는 대신 춘장을 볶고 밀가루 반죽을 치댔다면, 최소한 배곯으며 살지는 않았으리라.
신포시장 한복판 컴컴한 양화점 작업실에서 신 만드는 데 평생을 쏟아온 곡덕성(59) 씨. 그가 걸어온 길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았다. 그는 열다섯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구두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도 바다 건너 대륙의 장터에서 신발을 만들어 팔았었다.
처음엔 구겨진 못을 펴는 일부터 했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빨려 들어가듯 굴 속 같은 작업실에 처박혀 쉴 새 없이 망치질을 했다. 아버지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지 않으셨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생에 처음으로 구두를 완성했다. 아버지가 칼날 같은 눈빛으로 그와 동생이 만든 신을 살폈다. 불합격이었다. 아버지가 구두로 뺨을 무섭게 후려쳤다. 어린 그에겐 너무도 가혹했다. 지금도 몸서리쳐지는 그때의 기억은 아직 지워지지 않는 상처다.
그 후로도 오로지 일만 했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자정이 늦도록 공구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결혼이라는 거사도 요릿집 중화루에서 부랴부랴 치르고, 신혼여행은 애관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음날 바로 일했다. 하루라도 쉬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뿌리가 시작된 중국 땅도 이제껏 밟은 적이 없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없다. “배울 때, 아주 힘들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다 아버지 덕이지. 엄하셨어도 사나이 중의 사나이, 멋진 분이셨어요.”
‘꽝꽝, 꽝’ ‘드르륵드르륵’ 망치질 소리, 구식 미싱기 돌리는 소리가 작업실 짙은 어둠 속에 울려 퍼진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숨 가쁘게 달음박질하는 속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니나 다를까. 한밤중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소년의 고운 손이 주름지도록 빚어낸 신발은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인천 멋쟁이들은 너도나도 이집 신발을 사 신었다. 주문한 신을 품에 안으려면 꼬박 보름이 걸렸다. 소문을 듣고 구두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모여들고, 양화점 골목도 생겨났다. 지금은 다 지난 일이다.
초라한 진열장 위 가지런히 놓인 곡 씨의 신발들은 세월 흐른 지금도, 여전히 비단결처럼 곱디곱다. 하지만 좁고 어두운 작업실에 자신을 가두겠다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시간은 먼지 되어 쌓이고…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수놓인 그 빛은 언젠간 퇴색되어 사그라질 것이다.



농사꾼 아버지, 칼을 잡다
차이나타운 ‘곡가’










온 세상이 잠든 새벽길, 다섯 살 소년은 우마차를 타고 매일 독쟁이 고개를 넘었다. 아버지는 새벽이면 용현동 집에서 숭의동 깡시장까지 가 야채를 팔았다. 여덟 남매 가운데 딸 셋을 내리 낳고 처음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어디든 데리고 다니셨다. 아들은 시장통에서 중국 호떡 사 먹는 재미에 눈을 비비며 길을 나섰다. 분주함이 가득한 시장 한복판, 거기서 후후 불어먹던 뜨끈한 호떡, 집으로 가던 길 부옇게 밝아 오던 새벽빛….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곡창신(63) 씨의 할아버지는 1932년, 당시 열두 살이던 아버지를 데리고 산둥성 연태에서 인천으로 왔다. 당시 중국은 사는 게 넉넉지 않았다. 너도나도 먹고살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할아버지 동네에 살던 친척들도 거의 함께 왔다. 당시 인천으로 오는 배가 하루 두 번 있던 것으로 들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곡 씨 일가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뿌리내린 곳은 남구 용현동이었다. 당시 이곳은 중국 동네로 불릴 만큼 화교가 많았다.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은 대부분 북성동에서 상권을 이루거나 용현동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가 여섯 살 때, 농사짓던 곡 씨 네는 오늘날의 숭의동 공구상가가 있는 독갑다리에중국 요릿집을 열었다.
여기에는 당시의 시대상이 얽혀 있다. 한때 번성했던 화교들은 1960년대 이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와 화폐 개혁으로 역경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곡 씨의 아버지도 농사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생명처럼 여기던 땅을 팔아버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렸지만, 철없는 아들은 하루 세끼 짜장면을 먹을 수 있어 그저 좋았다.
운명이었을까. 아버지의 선택은, 훗날 곡 씨의 인생을 결정지었다. “초등학생 시절, 주방장 아저씨가 요리하는 걸 몰래 훔쳐보곤 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에게 혼쭐이 났지요. 그 일이 쉽지 않은 걸 알기에,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라신 거죠.”
하지만 ‘요리사 곡 씨’의 인생은 이미 시작됐다. 그는 중학생 때 공화춘 다음의 중국 요릿집이었던 평화각에서 주방 일을 처음 시작하고, 이후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닥치는 대로 일을 배웠다. 열정만큼 실력도 쌓여 갔다. 1970~80년대에는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중식당을 비롯해 유명 레스토랑 주방을 책임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연안부두의 요릿집 ‘만다린’과 차이나타운의 ‘중국성’ 등을 운영하며 유명세를 탔다. 최근에는 대만에서 요리를 배운 아들 곡승호(24) 씨와 함께 요릿집 ‘곡가(曲家)’를 열었다.
“100% 찬성하지는 않지만 기술이니까. 그래도 요즘 요리사가 인정받고 있으니 혼자 세상 살아갈 수는 있지 않겠어요?” 말은 퉁명스럽게 내뱉어도 눈빛엔 애정이 서려 있다. 어제의 아버지와 달리, 오늘의 아버지는 ‘곡가’의 대를 이어 요리하는 아들이 자랑스럽다.


쓰디쓴 인생, 달콤하게 빚다
중산학교 앞 ‘복래춘’








아버지는 빵과 과자를 굽고, 어머니는 차이나타운 아래 부둣가에 내다 파셨다. 한국말을 전혀 몰랐던 어머니는 ‘빵’ ‘빵’이라고 간신히 외마디 단어를 외칠 뿐이었다. 배고팠던 뱃사람들은 이게 무슨 빵이냐며 ‘공갈’친다고 역정을 냈다. 우리가 아는 ‘공갈빵’은 그렇게 태어났다.
곡회옥(68) 씨는 차이나타운 중산학교 앞에서 중국 전통과자점 ‘복래춘’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인천에서 복래춘을 모르면 간첩이다. 복래춘은 차이나타운에선 유명한 터줏대감이다. 처음엔 원조 공화춘(현 짜장면박물관) 가까이에 있다, 50여 년 전 지금의 자리로 왔다.
그 역사는 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할아버지는 화교들이 물밀듯 몰려들던 1920년대에 산둥성 연태에서 한국으로 왔다. 중국에서 과자를 만들던 할아버지는 서울 소공동과 북창동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 6·25 전쟁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는 온 가족이 인천으로 왔다. 아버지는 번듯한 가게 한 칸 없이 거리에서 월병과 공갈빵을 만들어 멀리 서울까지 내다 팔았다. 아버지는 쓰디쓴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지문이 닳도록 달콤한 과자를 빚고 또 빚었다. 하지만 힘든 상황에서도 늘 밝고 여유가 넘쳤다. 곡회옥 씨가 아내 유서진(64) 씨와 부부의 연을 맺은 것도 그런 아버지 덕이다.
6·25전쟁 때 1·4후퇴로 인천에서 경기도 양평까지 흘러들어간 아버지는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구걸했다. 전쟁 통에 다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인데, 인심 좋은 유 씨의 친정아버지가 선뜻 쌀 두 가마니를 내놓았다. 단지 사람이 좋아 보여서 였다. 전쟁이 끝나고, 두 어르신은 서울 한복판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기막힌 인연이었다.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녀의 혼인을 약속했다. 남다른 인연의 부부가 지켜온 전통은 아들 곡사충(35) 씨가 사 대 째 이어가고 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제게, 저는 아들에게 옛 방식 그대로 전하고 있어요. 지금도 중국 연태에 가면 똑같은 방법으로 과자를 만들어요. 이것이 바로 본토에서 전해 내려온 ‘백 년 전통’입니다.”
가게 한 편에 걸린 곡 씨 집안의 가계도에 시선이 닿는다. 월병을 만들며 손맛을 이어가는 가족의 이름에만 붉은색 테두리가 선명하게 새겨 있다. 흔들림 없이 전통을 이어가는 집안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 마음을 증명하듯 세월이 자욱이 쌓인 가게엔 손때 묻은 도구들이 아직 남아 있다. 할아버지께서 월병 무늬를 찍어낼 때 사용하던 백여 년 된 나무틀은 이 집의 가보다.
갓 구워낸 팔보월병을 한 입 베어 문다. 바삭한 반죽 속에 꽉 찬 여덟 가지 견과류의 고소함이 입 안 가득 번진다. 과하게 달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는 맛이다. 가만히 백 년 동안 이어 온 곡 씨의 손맛을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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