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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동력차 전기 정비 김용근 명장
“소리만 들어도 전동차의 상태를 알 수 있죠”
글 /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 사진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1899년, 대한민국 철도 역사는 인천으로부터 시작됐다. 118년 철도 역사를 이끌어 온 힘은 무엇일까? 승객과 화물의 안전한 수송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린 수많은 손길들이 아닐까. 레일 위에서 한평생을 바쳐 온, 안전 운행의 파수꾼 전동차 전기 정비 명장을 만났다.
열차들의 슈바이처로 살아 온 정비 명장
“레일 위를 열심히 달리다 지친 모습으로 돌아온 기차를 점 검하고 때를 벗겨 내어 새 것처럼 내보낼 때의 보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인천과 의정부를 오가는 경인전철, 서울지하철 4호선, 수인선을 달리는 전동차 검수와 정비가 이뤄지는 시흥차량사업소. 이곳에는 철도 정비에 평생을 바친 김용근(63) 명장이 있다.
꼼꼼한 점검과 정비를 위해 백 톤이 넘는 전동차가 통째로 들려 본체와 바퀴 부분으로 나눠지고, 이어 볼트 하나하나까지 완전히 분해된다. 쇠 위로 쇠가 달리는 열차 바퀴는 엄청난 마찰로 마모가 심해 집중 정비 대상이다. 깎아내고 기름 치고, 컴퓨터를 이용해 바퀴 축의 균형을 맞추고, 녹이 낀 부품은 세척한다. 세부 정비가 끝나면 다시 조립해 전동차의 모습을 갖추고, 시운전을 마쳐야 비로소 전동차는 다시 철로 위를 달리게 된다.
김용근 명장은 매일 매일을 열차가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도록 열차의 전기, 기계 장치 등과 씨름한다. 한 달에 넉 대 씩, 전동차가 그의 손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렇게 열차와 함께한 세월이 벌써 38년째다.
한 우물을 파는 성격이 만든 외길 인생
김용근 명장은 1954년 3월 전라북도 순창에서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다 20대부터 인천에서 장사하는 형제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인천에서 살게 됐다. “인생 대부분을 인천에서 살았으니 인천이 고향인 셈이죠. 형님과 누님은 양키시장에서 장사를 했어요. 둘째 형님의 권유로 철도 정비에 발을 들이게 됐는데, 형제들 중에서는 제가 유일하게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가족의 권유로 우연찮게 철도 정비에 발을 들인 김 명장은 철도의 매력에 금세 빠져들었다. 어릴 적 꿈은 운동선수였지만 철도 정비를 배우면서 뿌리를 내릴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김 명장은 지난 1980년 2월 당시 철도청 서울공작창 전기차공장 정비원으로 입사해 정년퇴직한 2012년 6월 30일까지 한국철도공사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에서 열차 정비 일을 했다. 비록 나이 때문에 퇴직을 했지만, 현재 (주)한국철도차량엔지니어링에 근무하며 여전히 손에서 열차 일을 놓지 않고 있다. “제가 한 우물만 파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계속 이 일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보통 전동차 수명을 35년까지 봅니다. 제가 지금 38년째 열차 정비를 하고 있는데, 저와 비슷한 시간을 철로 위에서 달린 전동차를 보면 ‘아, 나와 인생을 함께 걸어가고 있구나’라는 각별한 느낌이 듭니다.”
성실과 노력이 이뤄낸 2개의 명장 타이틀
김 명장이 철도 정비에 매진하면서 이룬 대표적인 성과는 품질 관리와 품질 개선. 그는 전기 차량 작업 공정을 수작업에서 기계화 및 자동화 방식으로 변경하고, 분산 작업 방식을 통합 작업 방식으로 개선하는 등 총괄적인 품질 개선 활동을 추진했다. 또 한국철도공사 최초로 전국 품질분임조 경진대회에 출전, 각종 장치별 작업 공정과 품질 개선 사례 등을 인정받아 2000년과 2005년, 2008년 대통령상을 세 차례나 받았다. 또 선진국 사례를 수집하고 국내 철도 현장에 접목·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철도 발전 공로 표창, 국무총리 표창 등도 수상했으며, 2004년에는 국가품질명장으로, 2005년에는 대한민국명장으로 임명됐다.
“명장이 되고나서 더 긴장하고 있어요. 명장이라는 이름에 누가 될까봐 항상 더 노력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죠. 명장은 자부심이지, 자랑거리는 아니죠. 스스로 겸손하고, 더 큰 책임감을 갖게 하는 것 같아요.”
“아들 녀석이 대학교 때 교수님이 누굴 제일 존경하느냐고 물었는데, ‘아버지’라고 답했대요. 내세울 거 없는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하니 감격스럽고 고마웠죠. 명장 타이틀보다 아들에게 인정받은 아버지로서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요?”
아픈 자식을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김 명장은 전동차를 탈 때도 보통 사람들처럼 스마트폰이나 책을 읽기보다는 열차의 소리를 민감하게 느낀다. “예전에 열차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열차를 타면 소리를 먼저 듣게 됩니다. 객차 밑에서 나는 이음이라든지, 열차가 정차하거나 출발할 때 소리로도 열차의 이상 유무를 알 수 있거든요.” 아픈 자식을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김 명장에게 있어 열차는 또 다른 자식이다. “열차 타면서 ‘아, 이건 언제 수리했던 차인데…’ ‘아, 이 녀석을 수리하면서는 정말 많이 고생했었지’라는 기억이 떠오르죠.”
먼저 이 길을 갈고 닦아 온 선배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김 명장. 하지만 그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철도 명장의 끈을 이어갈 후배들이 많이 빠져나가고 있는 탓이다. 김 명장은 “118년 우리나라 철도 역사를 통틀어 철도 명장이 몇 명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반드시 보답이 돌아오는 철도 분야에서 많은 후배들이 꿈을 이룰 수 있길 바랄 뿐이죠.”
증기기관차부터, 디젤기관차와 전기기관차를 거쳐 KTX까지. 그 뒤안길에는 김 명장처럼 승객과 화물의 안전한 수송을 위해 땀 흘린 수많은 기능공들의 인생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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