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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인천 사람 승란 씨의 결혼식 이야기
1970년 인천 사람 승란 씨의 결혼식 이야기
50년 넘게 남구 용현2동에서만 살아온 김승란 씨(69세).
그녀는 지난해와 올해 자신의 결혼과 관련된 자료 20여 점을 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조심스레 자료를 건네주던 승란 씨에게 이 자료는 무엇보다 소중하지 않을까?
글 / 배성수 시립박물관 컴팩스마트시티부장
사진 / 시립박물관
▲ 승란 씨 부부의 결혼사진 ▲ 2015년 승란 씨 부부의 제주도 여행 사진
김승란 씨는 1949년 3월 서울 중구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을 따라 인천으로 이사 온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용현2동에 있던 대성목재에 입사했고,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 정복진(74) 씨를 만났다. 중매결혼이 대부분이었을 시절, 두 사람은 1년 넘는 연애 끝에 1970년 1월 약혼식을 올렸다.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탓이었는지, 결혼에 앞서 약혼식을 치르는 모습은 당시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승란 씨 부부는 인천의 여느 신혼부부처럼 배다리 중앙시장에서 혼수를 준비하고, 싸리재에서 예물과 예복을 맞추었다. 결혼식을 앞 둔 어느 날 밤, 승란 씨의 예물과 한복, 사주단자가 담긴 함은 신랑 친구의 등에 얹혀 용현동 신부 집으로 들어왔다. 그 시절 여행 가방은 무거운 나무함을 대신하기 시작했고, 신혼여행의 짐을 담는 용도로도 재활용 되었단다.
승란 씨 부부는 같은 해 5월 10일 지금 숭의동 축구경기장 건너편 광해 리드빌 자리에 있던 동원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인천 사람들 대부분은 싸리재 신신예식장이나 용동 마루턱 중앙예식장과 원앙예식장에서 평생 가약을 맺었지만, 승란 씨처럼 남구 일대에 거주하던 이들은 동원예식장과 장안예식장을 이용하기도 했다. 요즘 결혼식에는 비디오 촬영이 필수 코스이듯, 1970년대 예식장에서도 결혼식 과정을 녹음하여 릴 테이프나 레코드판으로 만들어 주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예식장에 마련된 식당이나 근처 중국 요릿집에서 피로연을 베풀었고, 하객에게는 떡이나 세제를 선물로 주었다.
당시 인천 신혼부부들에게 가장 있기 있던 신혼여행지는 속리산과 온양온천을 도는 코스였다. 그나마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경주와 부산을 선택하기도 했다. 지방으로 떠나는 고속버스가 없던 시절,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송도유원지나 자유공원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는 신혼부부도 많았다. 승란 씨 부부는 결혼식이 끝난 후 온양온천을 예약해 두었으나, 짓궂은 친구들 때문에 기차 시간을 놓치고 결국 인천에서 첫날밤을 보내야 했다. 사진 촬영을 핑계로 부부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신부가 그러했듯 승란 씨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 두었고, 살림에 전념하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1970년 인천 사람 승란 씨의 결혼 이야기’는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기록해 두지 않는다면,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또 변한다.
승란 씨가 기증한 십수 점의 유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로 박물관은 지금과 또 달랐던 1970년 인천의 결혼 문화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박물관에 기증되는 유물에는 그에 얽힌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인천 생활사의 한 장면이 될 그것을 끄집어내어 기록하고, 후세에 전달하는 일 또한 박물관의 사명 중 하나다.
▲ 승란 씨가 결혼식을 올린 동원예식장 홍보용 성냥갑
1970년대 동원예식장 홍보용 성냥갑. 성냥갑에 새긴 ‘득남의 전당’이라는
문구에서 당시 사회적으로 팽배했던 남아선호 사상을 짐작할 수 있다.
▼ 청첩장
승란 씨 부부의 주례는 도화감리교회 고용봉 담임목사가 맡았다.
청첩장에는 지금과 달리 신랑 신부의 가까운 친지들이
‘청첩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 결혼식 과정이 녹음된 릴 테이프
당시에는 예식장에서 결혼식 과정을 녹음하여 릴 테이프나
레코드에 담아 신랑, 신부에게 기념으로 주었다.
▲ 승란 씨가 약혼식과 결혼식 때 받았던 예물들
시계와 팔찌는 정복진 씨가 배다리 형제사에서 준비한 승란 씨의 결혼 예물이다.
승란 씨는 싸리재 동양당에서 신랑 예물을 맞추었다.
붉은색 함은 사주단자를 담았던 함으로 윗면과 전면에 ‘壽福’이라는 한자가 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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