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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코레아노를 위해
쿠바 코레아노를 위해
글 / 신은미 한국이민사박물관장
2016년 12월 어느 토요일, 칼바람이 제법 쌀쌀한 날이었다. 한국을 방문한 쿠바 한인 후손 6명이 시간을 내 우리 박물관을 찾았다.
까무잡잡한 피부, 깊고 짙은 눈매를 한 쿠바 청년들은 처음 느끼는 차가운 겨울 날씨 탓인지 잔뜩 몸을 움츠렸고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설렘과 긴장이 가득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전시실로 향했다. 초기 한인의 이민 역사를 차례로 살펴보다 드디어 쿠바 전시실 앞에 섰다. 쿠바 한인 사회를 이끌었던 증조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사진을 보면서 경직되었던 그들의 얼굴이 환해지고 조심스럽던 입술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이야기를 통해서만 들었던 할아버지의 나라, 막연한 그리움을 안고 막상 그곳에 왔지만 여전히 낯설고 두려웠던 감정들이 해소되는 듯한 감격을 누리고 있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1921년 멕시코에서 건너간 288명으로 시작된 쿠바 한인들의 흔적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쿠바 청년들을 통해 찾는 순간이었다.
1903년~1905년까지 이루어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민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05년 5월,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향하던 1천33명의 이민자들이 있었다. 연중 온화한 날씨와 아이들의 교육이 보장되고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4년간 노동 계약을 체결하고 떠났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유카탄 반도의 뜨거운 태양과 살을 찌르는 에네켄 가시였다. 1909년 에네켄 농장에서의 지옥 같은 생활에서 해방되었지만 멕시코 내란과 혁명으로 한인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1921년 멕시코 한인 280여명이 쿠바로 재이민을 가게 되었다. 이들이 쿠바 한인의 시작이다.
방문한 일행 중에는 쿠바 한인 1세대로 고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고 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셨던 독립 운동가 임천택(1903-1985) 선생의 증손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한 TV 인터뷰에서 증조부의 삶처럼 본인도 쿠바의 한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다른 어떤 지역보다 쿠바 한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멕시코 이민은 한 차례에 불과하였고 쿠바로의 재이민도 제한적이었다. 1945년 쿠바 내정 변화, 1959년 쿠바혁명 등으로 고국과 단절된 세월은 더 깊어졌고 그만큼 현지화 진행이 빨리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한인회를 조직하며 고국을 그리워했던 선조들의 마음이 이민 4세로 접어든 후손들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아메리카 대륙 한인 이민의 끝자락에 쿠바 한인이 있다. 쿠바의 코레아노들 또한 한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이 청년의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내 가슴에 새긴 한 구절
“최선을 다하되 나머지는 잊어라”
(Do your best and forget the rest)
- 메이저리그 통산 2,000승의 명장 월터 앨스턴 감독 -
메이저리그 통산 2,000승 이상을 올린 명장 월터 앨스턴 감독이 한 말이다.
말처럼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실천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살아가면서 다양한 벽에 부딪힐 때 조용히 되뇌어 보면 가끔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거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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