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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강화’ ‘멋쟁이 필수품 ‘웸블리넥타이’
‘메이드 인 강화’
멋쟁이 필수품 ‘웸블리넥타이’
강화도는 돌멩이 하나, 나무 한그루 허투루 볼 수 없는 곳이다. 우리나라 5천년 역사를 함축적으로 품고 있고 산과 갯벌 등 생태환경은 '청정1급’ 그 자체다. 이곳에 한때 ‘공장’들이 즐비했고 높다란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강화군에는 1916년 강화직물조합이 설립될 만큼 섬유 생산 시설이 많았다. 365일 직조기 소리가 강화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1960~70년대에는 제일모직이나 선경보다 규모가 컸던 공장이 있었을 만큼 직물산업이 전성기를 누렸다.
글·사진 유동현 본지 편집장
갑부의 고장, 강화
강화 여인들의 손재주는 탁월했다. 화문석을 짜던 섬세한 손은 400여 년 전 부터 직물을 짜서 내다팔 만큼 탁월했다. 1910년대 개량 직기가 보급되었고, 두 집 건너 한 집씩 수족기로 인조견(비단)을 짰을 정도로 강화엔 각종 직물이 넘쳐났다. 말리기 위해 들판에 걸어 놓은 하얀 천이 마치 섬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물길처럼 보였다.
당시 판로는 뚜벅이 행상에 의존했다. 강화부녀자들은 바닷길을 건너 전국으로 비단 장사 행상길에 나섰다. 이른 봄이 되면 남자 상인이 여러 직물들 을 구입한 뒤 부녀자 예닐곱 명을 고용하여 객지로 장삿길에 나섰다. 고을 주막이나 마을 가게에 근거지를 정한 뒤, 포목을 머리에 이고 뿔뿔이 헤어져 집집을 돌며 물건을 팔았다. 직물 한 장에는 제작부터 판매까지
강화 여인들의 억척스러움이 그대로 배어 있다.
가내 수공업 형태였던 강화의 직물산업은 1933년 인조견 공장 조양방직이 최초의 민족자본으
로 설립되면서 기틀을 갖춘다. 1934년 조양방직의 50여 대 역직기를 가동하기 위해 전기를 강화도에 끌어 들일 때부터 손과 발에 의존하던 강화의 방직산업은 대량 생산의 길로 들어선다. 강화읍 관청리 살창부락 (구)한전 자리에 백열등이 켜졌을 때, 전깃불을 구경하기 위해 강화읍은 물론 선원면, 송해면 일대에서 몰려 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육지의 웬만한 도시보다 먼저 전기와 전화가 들어온 것은 순전히 직물 산업 때문이었다. 이 시기 강화는 전국의 갑부 고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인구는 지금의 두 배 이상이었다.
국수발을 말리는 듯한 천 말리기 모습
은하직물 작업 모습. 현재 강화 내 소창 공장 11곳이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조양방직과 심도직물 쌍두마차
조양방직과 함께 강화의 경제를 이끌어간 쌍두마차는 1947년 설립된 심도직물이었다. 매일 노동자 1천 200여 명이 하루12시간씩 맞교대를 하며 직조기에 매달렸다. 당시 멋쟁이들의 필
수품이었던 최고급 ‘웸블리넥타이’를 생산하여 지역경제 발전은 물론 외화 획득에도 크게 기여했다.
1950년대 들어 송해면, 선원면에 이어 1960년대 강화읍, 하점면까지 직물 공장이 확산되었다. ‘철컥철컥’ 수천 여대의 역직기(옷감 짜는 기계)에서 밤낮으로 나는 소리가 섬 전체에 진동했다.
직물공장 종업원이 강화읍에만 4천여 명이었다.
1970년대 강화에는 조양방직과 심도직물을 비롯해 이화견직, 경도직물 등 크고 작은 직물공장 60여 개가 있었다. 인조견, 특수면직(광목), 소창, 넥타이류, 커텐 직물 등을 생산했다. 당시 섬유를 생산하는 대구, 나일론으로 유명한 수원과 더불어 전국 3대 직물도시
로 손꼽혔다.
강화 여인들이 있는 한 천년만년 갈 것 같았던 강화 직물산업은 침체기에 접어든다. 나일론 등 인조 직물이 등장하고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면서 강화 직물은 직격탄을 맞았다.
섬유산업 합리화 정책 때 현금 보상을 받고 방직기를 폐기했다. 직물 짜는 사람들도 섬을 떠났다. 역직기 소리도 희미해졌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100년 넘은 기계 앞에 선 은하직물 이병훈 (85) 대표
평화직물, 체험관으로 부활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재 강화 내 소창 공장 11곳이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소창은 이불이나 베개 따위의 안감이다. 옛날에는 기저귀로 많이 쓰였던 면직물이다. 강화의 대표 직물인 소창은 짜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오랜 세월 친숙했던 옷감이었지만 지금은 소창 자체가 잊히고 있다.
강화 소창이 부활한다. 관광 상품으로 돌아온다. ‘인천 가치재창조 선도 사업’ 10개 군·구 공모전에서 ‘강화 소창직물 육성사업’이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강화군은 소창산업 육성과 관광 상품화를 위해 홍보·체험 공간을 마련했다. 1930년대에 건축된 평화직물 공장과 부속 한옥 그리고 일본식 별채 가옥을 활용한다. 이곳에서는 수십 년간 직조기 30대와 종업원 60여 명이 난초와 봉황이 곱게 새겨진 각색 양단을 생산했다. 공장 터에는 대량 생산을 이끌었던 나무 전봇대 두 개가 그대로 남아 강화 직물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있다.
1933년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조양방직의 사무실.2013년 TV드라마에서 옛날국수집으로 등장했다.
온천욕에는 소창 수건이 제격
강화직물조합이 설립된 지 100주년이 넘었다. 강화군은 ‘2018년도 올해의 관광도시’와 연계해 직물산업을 재조명하기 위해 교육 및 체험 전시관을 조성한다. 이에 발맞춰 ‘소창(면직물)’을 소재로 한 관광 상품으로 소창 손수건과 행주 등을 선보였다. 염색을 하지 않고 국내 최초로 소창 직물 위에 천연 디자인을 가미해 문양을 넣었다. 소창 손수건은 고려시대 도읍지였던 점을 감안해 고려황실문양을 입혀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소창 행주는 다산의 상징인 포도 문양을 넣어 소박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강화군은 최근 개장한 석모도 미네랄 온천 이용 시 흡수성, 통기성이 탁월한 무형광 친환경 소재로 만든 강화직물 소창 수건을 지급할 계획이다.
강화 소창 홍보·체험 공간으로 활용할 평화직물.당시 사용했던 2개의 나무 전봇대가 그대로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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