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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빚은 절대비경, 백령·대청
백령·대청
시간이 빚은 절대비경
세상에서 뚝 떨어져 서해 최북단에 오롯이 핀 섬.
바다 한가운데서 외로움 견디고 거친 파도 헤치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섬의 운명이다.
만약 쉬 닿을 수 있었다면 이토록 아름다웠을까.
세상 그 어디에도 비할 데 없다.
그 섬엔, 십억 년 아득한 시간이 빚은 절대비경이 있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백령·대청 탐사에는 우리 시 환경정책과 이현애 과장을 비롯한 담당 직원들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이수재 박사, 제주 지질해설사 등이 함께했습니다. 백령·대청에는 십억 년 시간을 거스른 지층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시는 이들 ‘가치 있고 아름다운’ 백령·대청 11개 지질 명소의 국가지질공원 인증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오는 2018년 국가지질공원 인증을 획득하고, 202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른 아침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대청도 건너 백령도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안개꽃이 바다를 하얗게 뒤덮었다. 아차, 비바람보다 무서운 것이 해미가 아니던가.
다행히 예정대로 여객선이 닻을 올리고 흰 물꽃을 일으키며 바다를 가로지른다. 뱃길로 꼬박 서너 시간을 달려야 다다르는 머나먼 섬. 제때 들어갔지만 제때 나올 수 있을까. 비에 젖어 출렁이는 바다를 보며 생각에 사로잡힌다. 뱃멀미로 속이 울렁인다.
검은낭에서 바라본, 햇살에 젖어 이드르르한 바다
수평의 바다에서 직각으로 솟아오른 ‘서풍받이’ 절벽
‘서풍받이’의 희생이 낳은 풍요
푸른 섬 온몸으로 지키는 절벽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대청도의 자태가 아른아른 보인다. 어느덧 배가 속력을 낮추고 뱃머리가 선착장에 부드럽게 입맞춤한다. 하늘엔 구름이 말끔히 걷히고 맑은 햇살이 내비친다. ‘아, 섬이로구나.’ 스치는 바람도 공기도 육지와는 다르다.
선착장 바로 옆에는 답동 해변이 있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암벽 검은낭에 최근 몽돌소리길, 파도소리길, 바람소리길이라는 예쁜 이름의 해안 산책로가 났다. 길은 나무 데크가 깔려 걷기 좋다. 중간중간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가만히 서서 바람의 감촉도 느껴본다.
이윽고 대청도의 첫 지질 명소인 ‘서풍받이’ 거대한 절벽에 이르렀다. 스케일이 다르다. “제주도와는 상대가 안 되네. 세계 지질 공원감이야.” 동행한 제주 지질해설사 현원호 씨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세계 곳곳의 지질 명소는 다 섭렵한 지질학 박사들도 찬사를 보낸다.
이 바위는 긴긴 시간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왔다. 수평의 바다에서 직각으로 솟아오른 해안 절벽. 그 맞은편에는 놀랍도록 평화로운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제 살 깎아내며 지키느라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가슴 한편이 저릿하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섬의 사막
탐사 이틀째, 섬의 하루가 밝았다. 이른 아침잠에서 깨자마자 ‘옥죽동 해안사구’로 발걸음을 옮긴다. ‘금빛 모래가 반짝이는 사하라 사막’을 마음에 그렸다. 하지만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겨울 북서풍이 불면 모래가 높이 쌓이는데, 이맘때는 거의 이동하지 않아요. 바람막이숲 때문에 모래 길이 막히기도 했고요.”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이수재 박사의 설명이다.
옥죽동 해안사구는 중국으로부터 날아 온 모래가 긴 세월 쌓이고 쌓여 언덕을 이룬 것이다. 때로 동네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놀 만큼 높다랗다. 하지만 나무를 심어 모래 길을 막으면서 언덕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자구책으로 육지에서 모래를 공수했지만, 사려 깊지 못했다. 현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돌멩이가 섞인 거친 모래를 퍼부은 것이다. “‘활동 사구’라는 말이 무색하게 죽어가고 있어요. 그래도 지역 주민이 사는 게 먼저이지 않겠어요.” 불편함을 감수하는 건 결국 자연에 순응하는 일이다. 자연을 따르기엔 우린 이미 문명의 편리함에 젖어 있다.
지구의 나이가 켜켜이 쌓인 ‘나이테바위’
바닷가에 새겨진 ‘어제와 오늘’
옥죽동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농여 해변에 이른다. 백령·대청에는 유독 지층이 세로로 서거나 뒤집힌 곳이 많다. 이 해변이 품은 ‘나이테바위’가 대표적이다. 섬 주민들이 고목나무라 부르는 바위에는 지구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 있다. 평평한 땅을 우뚝 일으켜 세운 거대한 자연의 힘이 가슴에 부듯이 느껴진다.
하루 두 번, 바다가 밀려간 자리엔 모래섬 ‘풀등’이 홀연히 솟아오른다.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모래사장은 폭신폭신해 걷기 좋다. 큰 바다로 미처 따라가지 못한 물은 웅덩이에 고여 작은 바다를 이룬다. 이 또한 절경이다. 물 빠진 해변은 곁에 있는 미아 해변과 하나로 이어진다. 이 바닷가 바위에는 십억 년 세월이 빚은 연흔(漣痕)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재밌는 건 파도가 바로 앞 모래사장에 똑같은 물결무늬를 새긴다는 사실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물결을 어루만지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소청도 분바위 지대는 ‘빛(色)’과 ‘꼴(象)’로 차 있다. 지형이 압도적인 데다 빛깔도 매력적이다.
검은빛, 옥빛, 하얀빛, 푸른빛이 대비되어 선명히 빛나다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빛을 창조한다.
북한 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 구조물들을 세워놓은 진촌 바닷가.
그 척박한 바다를 헤치고 억척스럽게 희망을 낚아 올리는 삶의 치열. 최북단 섬 백령도에는 ‘아픔’과 ‘희망’이 공존한다.
강렬하면서도 아스라하다. 섬은 세찬 기운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다 순간 아련한 여지를 남긴다.
농여 해변의 풀등이 그렇다. 바다가 섬을 놓아 주는 시간은 단 여섯 시간. 하루 두 번, 바다가 밀려간 자리엔 모래섬이 신기루처럼 솟아오른다.
글과 사진으로만 보던 섬을 눈에 담으면, 그 ‘놀라움’을 표현할 길이 없다.
두무진 바다 한가운데. 두 눈을 드는 순간, 원초적인 자연이 선사하는 경이가 바다와 어우러져 출렁인다.
‘아픔’의 바다에 핀 ‘희망’
섬을 건너 또 다른 섬으로 간다. 백령도 선착장에 도착하자 섬 주민이자 지질해설사인 박찬교 씨가 반갑게 맞는다. 그는 1972년 백령도에 첫 발령을 받은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당시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꼬박 열다섯 시간 걸려 섬으로 왔다. “그땐 섬에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도 그림같이 아름다웠는데, 섬 여기저기에 철조망을 두르면서 삭막해졌어요.”
동경 124도 53분, 북위 37도 52분. 최북단 섬 백령도에는 아픔과 희망이 공존한다. 지질 명소인 ‘감람암 포획 현무암’을 찾아 간 진촌 바닷가에도 그 현실이 살갗에 닿듯 끼친다.
백령 바닷가에는 여느 해변에서는 볼 수 없는 뾰족한 철 구조물들이 사열 받듯 일렬로 세워져 있다. 북한 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섬 주민들은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삶의 희망을 낚아 올린다.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긴, 뭐가 힘들어. 기운 넘치니까 하지. 얼마나 재밌어.” 어르신이 미역을 잔뜩 이고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물가를 나선다.
시에서 왔다고 하니, 작업물을 차로 옮기는 데 힘이 부친다며 바닷가까지 길을 내주면 좋겠다고 한다. 박 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아이고, 안 됩니다. 여기 천연기념물이 있어요.” 감람암을 품은 현무암은 지구 깊숙한 곳의 역사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지질 자료다. “그래요? 천연기념물이 다치면 안 되지. 아무렴, 내가 백령도 사람인데. 우리나라 섬 중에서 백령도가 제일이야.”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고향의 자연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고맙다.
‘늙은 신이 빚은 마지막 작품’ ‘두문진’의 속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백령도에는 ‘늙은 신이 빚은 마지막 작품’이 있다. 억겁의 세월이 빚은 ‘두무진’ 기암절벽의 자태는 진저리칠 정도로 찬연하다. 두무진 포구에서 유람선을 타면 이 일대를 둘러볼 수 있다. 선대암, 형제바위, 코끼리바위, 사자바위…. 한꺼번에 쏟아지는 절경에 감탄사가 연이어 터져 나온다. 이름처럼 용맹한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모습 같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들은 십억 년 전 형성된 규암이 단단히 굳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 풍화작용으로 암석이 붉게 물들고, 이질암과 실트암이 침식되면서 아름다운 무늬를 새겼다. 내친 김에 산책로를 따라 두무진의 품으로 파고든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절벽, 고개 들어 지나온 시간을 가늠해 본다. 몇 번을 올려다보았는지 모른다. 위풍당당한 기세에 눌려 숨이 막힌다.
섬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콩돌 해안에서 섬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바닷가에는 오색 빛깔 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이 쓰다듬고 간 자갈밭이 물결 따라 오묘한 빛으로 반짝인다. 크고 단단한 바위가 작은 콩돌이 되기까지, 얼마나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을까. 차르륵~ 차르륵 귓가에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무언가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청과 백령은 우리나라섬들 중 가장 오래됐으면서 또 경관의 아름다움이 탁월합니다.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섬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제주도에서 온 지질전문가 전용문 박사가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준다.
시간이 빚은 절대비경. 세계 곳곳을 누빈 지질학자들도 세계적으로도 닮은꼴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거리도 시간도, 아득히 먼 섬. 그 섬이 숨겨둔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세상을 향해 수줍지만 당당하게 고개를 든다.
백령·대청 지질 명소 탐사 일정
1일차 : 소청도 분바위와 스트로마톨라이트, 대청도 서풍받이와 기름아가리
2일차 : 옥죽동 해안사구, 농여 해변 고목나무와 풀등, 지두리 해변, 미아해변 쌍 물결무늬, 백령도 감람암 포획 현무암, 두무진
3일차 : 사곶 해빈, 콩돌 해안, 남포리 습곡
백령·대청 가는 길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여객선을 타면 대청 건너 백령으로 간다. 인천 시민은 뱃삯이 60% 할인된다. 지난달 6일부터 오전 백령 출항 여객선 ‘옹진훼미리호’가 3년여 만에 닻을 다시 올렸다.
문의 :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1599-5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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