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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문 너머 홍예 위로

2017-09-01 2017년 9월호



돌문 너머, 홍예 위로

지금은 지세(地勢)가 거의 헝클어졌지만 인천 앞 바다를 향해 달려오는 몇몇 산이 있다. 그 끝자락에 있는 것 중 하나가 자유공원을 품은 응봉산이다. 이 산의 모양새를 보면 율목공원 산과 이어져 있다. 그 줄기가 끊어진 곳이 용동마루턱이고 관통된 곳이 홍예문이다.

드론 촬영 홍승훈 자유사진가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응봉산 산줄기는 인천 역사의 한줄기였다. 전망 좋고 양지 바른 홍예문 남쪽 기슭은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과 미군정 시대에 중요한 인물의 주택과 주요 기관들이 자리 잡은 최고의 요지였다. 인성초등학교 자리에는 하와이 이민 중개업자 데쉴러가 살았다. 이 집은 일본식 정원을 갖춘 서양풍의 저택이었는데 고종황제가 구입하려고 할 정도로 멋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로코’라는 유명한 일본 요정으로 사용됐고 광복 후에는 최불암의 부친, 영화감독 최철 씨가 살았다.
인근에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처음 따낸 모오스가 살았다. 후에 이 집에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의원 의장을 지낸 곽상훈이 거주했다. 인천제일교회 본당 앞에는 해관(세관)장이었던 프랑스인 라포르트의 집이 있었다. 현재의 인성여중고 운동장에는 인천부립병원이 있었고 길 건너에는 인천경찰서와 공회당(시민관)이 있었다.



홍예문, 그 너머 동구


미워해야할 대상인데 예쁘다. 이 동네의 풍치를 그런대로 간직하게 하는 것은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돌문, 홍예문(虹霓門) 때문이다. 일본 거류민들은 전동과 만석동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문을 냈다. 일본 공병대가 암석 폭파 등 토목공사를 했고 중국인(쿨리) 석수장이와 조선인 노무자를 동원해 난공사 끝에 1908년에 완성했다. 1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6.7m의 폭은 그대로다. 당시의 우마차는 교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자동차로는 어림없다.




붉은 기와를 얹은 내동 교회


신포동에서 오르는 낡은 층층계단, 성공회 교회의 붉은 지붕과 어우러진 벽돌담 길, 갤러리 서담재의 높다란 축대 길, 아슬아슬 홍예문 윗길, 공원 광장으로 이어진 비탈 숲길…. 인천 도심에서 이만큼 고즈넉한 언덕길은 드물다. 이 길이 예쁜 것은 성공회 내동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1891년 인성여고 부근에 세워졌다가 1956년 현재의 위치인 성누가병원 부지로 옮겼다. 교회 뜰을 거닐다보면 갖가지 표지석과 기념비 그리고 흉상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안내문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구한말 역사의 한 페이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제물포구락부와 역사자료관(기와집)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은 그의 마지막 작품을 인천에서 완성했다. 1902년에 건축한 제물포구락부다. 외교관과 외국인 무역상 등의 친목을 위해 만든 사교클럽으로 당구장과 독서실, 그리고 근처에 테니스장을 갖췄다. 일본인들은 회원자격이 있었으나 끼지 못했다. 언어, 매너, 풍습, 네트워크 등을 따라가지 못해 무척 불편했을 것이다. 결국 제물포구락부는 서양인 전용 시설이 되었다.
아래 한옥 터에는 일본인 사업가 코노의 별장이 있었고 광복 후 ‘송학장’이라는 댄스홀로 사용되었다. 1966년부터 인천시장 공관이었다가 현재는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으로 사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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