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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해진 역사를 누군가는 기억해야죠.”
“희미해진 역사를 누군가는 기억해야죠.”
1960년대 인천에 영화 붐이 일었다. 한국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경동은 시네마거리로 불릴 만큼 극장이 많았다. 동방극장을 비롯해 문화, 미림, 오성, 인영, 인천, 인형, 키네마, 현대극장 등 인천 지역 대부분 극장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최초의 극장’과 ‘경동 시네마 거리’ 등 인천의 영화 이야기는 재조명할 가치가 분명하다. 윤기형 감독은 카메라에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았다.
글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영화 역사, 다큐멘터리로 만난다
“누군가는 한번 쯤 시도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애관극장과 미림극장(실버극장)만 남았지만, 옛날엔 경동에 19개의 극장이 몰려 있었죠. 다큐가 있을 법도 한데, 왜 없을까 궁금해지더라구요.”
윤기형 감독은 인천영상위원회를 통해 이미 여러 차례 인천의 극장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찍으려는 감독들이 있었지만 촬영 허가가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중에서 애관극장의 섭외가 가장 어려웠다. 하지만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애관극장은 카메라에 꼭 담겨야만 했다. 신흥동에 사는 부모님 댁을 방문할 때마다 애관극장을 찾아가 촬영 의지를 피력했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진심이 통했던 걸까요. 시끄럽지 않고, 요란하지 않게 찍는 조건으로 촬영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햇수로 3년째. 윤 감독은 작은 캠코더 2대와 삼각대로 동인천을 누비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인 그는 내년 초 ‘애관(愛觀)-보는 것을 사랑한다’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공개할 예정이다.
다큐멘터리 고양이춤
우연히 시작하게 된 영화의 꿈
그의 본업은 CF감독이다. 중앙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일찌감치 광고계에 발을 들였던 그는 2011년 다큐멘터리 ‘고양이춤’으로 이름을 알렸다. 언젠가는 극영화를 해야겠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지만, 현실은 그 꿈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연히 도서관에서 집어든 이용한 작가의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라는 책에 빠져 들었고,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이 다시 떠올랐다고. 그렇게 시작된 그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 ‘고양이춤’은 영화제 출품에 이어 극장 개봉까지 하게 되었다.
“다큐멘터리는 자유로워요. 광고는 광고주의 뚜렷한 요구와 시간에 모든 것을 맞춰야 하지만, 다큐는 찍을수록 새로워진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틈틈이 카메라를 들고 관심 있는 것을 찍던 취미는 ‘애관’이라는 또 다른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했다.
윤 감독은 송현동에서 자랐다. 인천에서 줄곧 살던 그는 결혼과 동시에 직장이 가까운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 서울에서 인천을 오간다. “학창시절엔 현대극장을 많이 다녔어요. 애관극장은 고급 극장이었는데,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자주 왔었습니다. ‘007시리즈’도 거의 다 애관극장에서 봤죠.”
1957년 애관극장
애관극장 1964
애관극장에서 시작된 ‘시네마천국’
애관극장은 1895년 부산 출신 부호 정치국이라는 사람이 세운 ‘협률사’가 그 시초다. ‘축항사’라는 이름을 거쳐 1926년에 ‘애관극장’으로 바뀌었다. “애관은 본래 애관(愛館)이었는데, ‘보는 것을 사랑 한다’는 애관(愛觀)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뜻이 극장과 근사하게 잘 어울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 다큐멘터리 제목을 그대로 옮겨 쓰게 됐습니다.”
애관은 영화뿐만 아니라, 강연이나 연주회장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20세기 최정상급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피아노연주회가 열리기도 했고, 이미자, 나훈아 리사이틀이 있는 날이면 몰려드는 관람객들로 인해 사고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애관은 연극이나 영화만 상영하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레슬링대회, 권투대회도 열리고,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장소로도 각광 받았던 복합 문화공간이었죠.” 또 애관극장이 위치한 인천 경동거리는 그야말로 ‘시네마천국’이었다. 미림, 오성, 키네마, 동방, 인영, 동인천, 문화, 인천극장 등 인천의 주요 극장들이 모두 이곳에 위치했었다.
현재 애관극장은 1926년 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손실되고, 1960년 개보수를 마치고 400석 규모의 극장으로 재개관한 데 이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2004년 전면 개보수해 5개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바뀌었다.
희미한 기억의 조각을 찾아서
윤 감독은 다큐를 찍으면서 안타까웠다. 극장이 최초로 생긴 도시가 인천임에도, 당시를 기억하는 역사적인 건물이나 기록 등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장과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증언을 생생하게 기록해나갔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한명숙 씨의 데뷔 무대가 애관극장이었습니다. 영화배우 전무송 씨는 잠깐 동안이지만, 애관극장에서 간판 그리는 일을 하셨답니다. 소래에서 태어난 연극인 박정자 선생님은 어릴 때 애관극장에서 본 ‘처용의 노래’를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현재는 공영 주차장으로 바뀌었지만, 동방극장에서는 대동신문 지사장이자 건설영화사 사장인 최철(최불암의 부친) 씨가 제작한 인천 최초의 극영화 ‘수우(愁雨)’의 시사회가 열렸다. 시사회 준비 중 과로로 눈을 감은 최철 씨의 영정을 그의 아내와 8살 난 아들 최불암 씨가 들고 시사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또 최불암 씨의 어머니는 당시 동방극장 지하에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문인들이 자주 모였던 ‘등대’라는 음악다방을 운영하기도 했단다.
120여 년 역사를 지닌 국내 최초의 극장. 이제 경동을 지키고 있는 극장은 애관극장밖에 없다. 애관극장은 우리 극장사에서 반드시 되돌아봐야 할 과제다. 그것은 국내 최초의 극장에 보내는 감사와 응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윤기형 감독은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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