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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浦의 댕구포砲

2017-11-02 2017년 11월호


소래포浦의 댕구포砲

2017년 인천은 ‘호국보훈의 도시’임을 천명하였다. 고려 후기 몽골과의 전쟁 중에 강화도가 제2의 수도로 역할했지만, 40여 년간 항몽의 근거지였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강화도는 수도를 방어하는 보장처로, 또 서해안 지역을 포괄하는 방어진지로 기능하였다. 이렇게 나라를 수호했던 역사적 흔적은 강화도의 진보와 돈대만이 아니라 문학산성, 계양산성, 화도진, 연희진, 중심성, 논현포대, 장도포대, 월미포대 등 인천 지역 곳곳에 남아있다. 인천이 6·25전쟁 당시 상륙작전의 현장이 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글 강옥엽 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장도포대

서해안의 전략적 방어진지 인천
근대 개항기, 계속되는 이양선의 출몰과 병인·신미양요 등 두 차례에 걸친 서양함대의 침공, 그리고 1875년 운요호 포격사건은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 연안 방비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서해에서 도성으로 이르는 길은 강화수로를 이용하는 것과 인천 연안에 상륙하여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지형을 모르는 외국 선박의 경우 수로를 통해 통상을 요구하여 왔고 이러한 과정에서 프랑스와 미국 함대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군과 강화도에서 격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1876년 일본과 체결된 강화도조약 이후에는 강화보다 인천과 부평 연안의 방비 문제가 급부상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도성으로의 접근이 강화수로보다 훨씬 수월하고 거리도 짧았던 인천, 부평로를 알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조정에서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일본 군함 운요호에 의해 영종방어영이 함락당한 이후 인천 연안을 방어할 군사력은 전무하였다.

1878년 8월 정부는 인천부의 방위력 강화를 위해 인천과 부평 연안에 진(鎭)과 포대(砲臺)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듬해 1879년 7월 두 진의 공사가 완료되어 인천의 신설 진은 화도진(花島鎭), 부평의 신설 진은 연희진(連喜鎭)이라고 명명하였고, 예하에 많은 포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포대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설치된 방어물로 경보와 척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돈대와는 달리 병력이 상주할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제(諸) 진의 관아에서 포대까지의 거리는 유사 시 병력이 쉽게 투입될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하였다. 화도진 소속 6개의 포대도 진사(鎭舍)의 인근에 위치하여 유사시 포군(砲軍)의 신속한 투입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현재 남동구에 소재한 장도와 호구포대(논현포대)도 이때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화도진에 있던 포군이 장도포대와 호구포대에 투입되기에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이들은 인천도호부에서 관할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도포대터



소래의 댕구포대와 호구포대
해안에서 육지가 바다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부분을 곶(串)이라 하고, 반대로 바다가 육지쪽으로 휘어 들어간 부분을 만(灣)이라 한다. 군사적으로 해안을 정찰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구조물은 대부분 곶(串)에 설치되어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고 방어 사격에 장애가 되는 자연 지형물이 없기 때문이다.

강화도에 축조되었던 돈대(墩臺)는 해안 돌출부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다. 이는 해안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찰하고 경보하는 경계의 기능과 공격하는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망권이 요구되는 돈대의 위치는 높을수록 유리하였고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해안 돌출부의 구릉이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선박의 수로 통과 저지가 최대 목적인 포대는 그 위치가 적선의 눈에 띄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해안 돌출부 구릉의 저사면이나 해안 저지대에 축조되었다.

남동구 논현동에 있는 논현포대는 축조 당시 호구(虎口)포대라고 명명하였다. 오봉산 기슭에 마치 호랑이가 한껏 입을 벌린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검은바위가 바로 호구암인데 이 포구를 ‘호구포’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또한 소래포구에서 경기도 시흥시로 이어지는 소래철교의 끝 ‘댕구산’에는 장도포대(獐島砲臺)가 있다. 원래의 지명은 장도였으나 이곳에 있던 대포가 ‘대완구(大碗口)’라는 이름의 커다란 화포였고 이 대완구가 ‘댕구’가 되고, 거기서 댕구산이라는 이름도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장도는 글자 그대로 ‘노루섬’이라는 뜻인데 대개 땅 이름에 쓰일 때는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길게 뻗은 곳’을 말한다. 남동구의 포대 2곳은 모두 인천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호구포대와 장도포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주 수로에서 갈라져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승기천과 동방천의 연변이다. 동방천 초입의 소래포구는 현재도 소규모 어선의 포구와 어시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각기 2혈과 3혈을 가진 소규모 화력으로 갯골을 따라 접근하는 적선의 상륙을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축조되었으나 화도진과 연희진을 벗어나 우회하는 적선을 차단하기 위한 보조 방어물로 기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안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곶(串)에 인공적인 방어시설인 포대를 집중 배치했기 때문에 첨단 무기로 무장한 서구 열강의 신식 선박들이라 하여도 이 지역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호구포대

인천주권은 해양주권
1880년 인천의 개항이 기정사실화되자 일본 및 외국선박의 상륙을 저지하고 연안방비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설치된 화도진과 연희진은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어 일제의 강압에 의해 1882년 6월 연희진은 혁파되고 화도진은 훈련도감으로 이속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것은 다음 해 1883년 인천 개항을 위한 전단계로, 이 지역의 군사시설이 해체된 것이다.
인천은 개항을 전후해서 해상 방어선이었던 화도진과 연희진 그리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지었던 부평의 중심성과 기연해방영을 지켜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해양주권의 상실과 국운의 침체가 동일하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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