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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종이를 대준 강익하
2017-12-04 2017년 12월호
‘백범일지’ 종이를 대준 강익하
김창수를 백범 김구로 만든 이들은 인천 사람들이었다. 강화 출신 김주경(金周卿), 인천 시천동 출신 유학자 유완무(柳完茂) 등이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금융인 강익하(康益夏)이다. 백범 김구의 제자인 그는 인천에서 미두로 큰돈을 벌어 후에 대한생명을 창업했다. 무엇보다 그는 백범일지의 종이를 대주었다.
글 장회숙 인천도시지원디자인연구소 대표

백범 김구는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교육자로서 백범 김구의 출발은 어디였을까? 백범 김구와 인천의 인연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감리서 감옥에 갇힌 의로운 청년 백범 김구는 아버님이 넣어주신 ‘대학’을 읽었다. 이뿐 아니라 감리서 직원이 구해다 준 신(新) 서적을 열심히 읽으며 척양척왜로 왜놈을 때려죽이는 것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 아니라 ‘저마다 배우고 사람마다 가르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다’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감리서 감옥에서 탈옥한 백범 김구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1900년대 황해도에서 구국 교육 계몽을 하면서 가르쳤던 것은 인천 감옥에서 깨우쳤던 새로운 문물을 전파하는 교육이었던 것이다. (김삼룡 지음, 백범김구 평전에서)
치하포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수감 중이던 백범 김구는 1898년 3월 9일 늦은 밤 인천감리서를 탈옥한다. 도주범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던 그는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돌아와 농촌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재령에 ‘보강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받았는데, 학생 한 명이 강익하(康益夏)였다. 백범 김구에게 한문을 배우던 이 소년은 훗날 인천에서 미두로 큰돈을 벌었고,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보험회사인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설립한다.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로 백범 김구가 구속되자 강익하는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해주지방법원 판임관으로 근무하던 1919년, 3·1운동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을 때였다. 황해도 연안 출신의 경성여고보생 한 명이 검사정의 질문에 불리한 답변을 하고 있었다. 강익하는 재판에 유리하게 통역을 해주어 소녀가 풀려나도록 했다.
이때부터 강익하는 소녀가 중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는 물론, 귀국해 이화여전에 입학한 후에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8년 동안의 집념에 감동한 소녀는 결국 결혼을 승낙하고 1928년 자신이 설립한 화광유치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소녀가 바로 이승만에게 이화장을 제공하고 ‘전쟁고아의 어머니’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휘경학원 설립자 황온순이다.
3·1운동 얼마 후 강익하는 돌연 법조계를 떠나 인천 미두장에 뛰어들었다. 중매점을 개업해 큰돈을 벌었으며 1927년에는 ‘서선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상무취체역으로 부임했다. 1932년 조선취인소가 출범하자 인천에는 강익하 상점을, 경성에는 금익증권을 개점했다.

강익하 상점을 소개한 신문 광고

현 KB국민은행(중구 제물량로·해안동)
부근에 있던 강익하 상점
강익하는 ‘기정미총람’과 ‘익정보’를 발간하며 일본인 미두업자에 비해 한발 앞선 정보력과 영업력을 보였다. 미두와 주식으로 큰돈을 번 강익하는 수해 때마다 기부자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등 학교와 사회에 기부도 많이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강익하는 3·1동지회를 결성하고 귀국한 백범 김구를 보필했다. 상공회의소 부의장 시절에는 이승만에게 정치 자금 500만 원을 제공하고 백범 김구에게도 300만 원을 제의하기도 했다. 강익하는 홍콩에서 뷰익 48년형 자동차를 구입해 백범 김구에게 업무용 차량으로 제공했다. 무엇보다 홍콩에서 백범일지를 인쇄할 용지를 구입해 주었다.
백범 김구가 사망하자 그는 장례위원을 맡아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미두 재벌 강익하는 1946년 최초의 민간보험사인 대한생명을 설립하고 최대주주 겸 초대 사장으로 부임했다. 회사명은 3·1운동 당시의 ‘대한독립만세’를 떠올리며 대한생명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강익하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대한증권거래소의 개장을 보지 못하고 2개월 전인 1956년 1월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인천에서의 미두왕은 일확천금으로 조선 제일의 미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함께 살 집이 채 지어지기도 전에 미두로 망한 반복창을 기억한다. 그러나 강익하는 투기성 짙었던 미두계를 과학적인 통계와 치밀한 분석으로 석권했다. 일본인들에 맞서 미두와 증권계를 주름잡으며 증권시장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는 한편, 어려운 조선 사람들 편에 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정부 수립은 물론 보험 등 경제계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당시 백범 김구의 제자 강익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상이었다. 인천감리서 감옥에서 싹튼 백범 정신이 자신의 제자인 강익하를 통해 인천은 물론 대한민국에서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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