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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위에, 추억을 짓고 기억을 세우다
빌라 위에, 추억을 짓고 기억을 세우다
때론 오래된 것이 더 새롭고 아름답다. 인천은 과거와 미래가 조화로운 도시, 최초와 최고가 공존하는 도시다. 시간의 흔적을 온전히 보듬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을 찾아간다. 그 첫 번째로, 낡고 오래된 다세대주택을 시대의 감각으로 재구성한 ‘크로마이트 커피’의 문을 두드렸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크로마이트 커피’는 여섯 가구가 살던 다세대주택이었다.
겉모습은 주변의 연립 주택과 다르지 않지만, 그 안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의외의 장소, 예상 밖 매력
‘크로마이트 커피’를 찾아가는 길은 미로 같았다. 연수구 옥련동 주택가의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가면서, 길을 제대로 들었는지 자꾸 의심이 났다. 다행히 카페가 나왔다. 겉모습은 주변의 다세대주택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은 전혀 예상 밖의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인적이 드물었던 이 골목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기 시작한 건, 지난해 1월 ‘크로마이트 커피’가 문을 열면서부터다. ‘크로마이트(Chromite)’는 인천상륙작전의 암호명. 부산에서 이름난 커피 전문가인 전승예(57) 대표와 진선기(29) 매니저가 커피에 대한 자신감 하나만으로 인천 상륙을 감행했다.
아무리 커피 맛으로 승부한다지만, 이 후미진 골목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공간의 끌림에 신경을 썼다. 원래 이곳은 여섯 가구가 살던 다세대주택이었다. 지은 지 25년 된 오래된 집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이는 친환경 디자인을 하는 정순구(42) 작가다. 카페 그 이상의 문화공간으로 떠오른 재생 건축 ‘앤트러사이트’와 ‘잇다 스페이스’에도 그의 손길이 스며있다. “공간은 저마다 사연이 있고, 시간적인 역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물마다 그 맛이 다 다르지요. 잊히고 단절된 공간 안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끌어내 새롭게 풀어내는 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
원래 주인이 남긴 물건은 거둬들여 다시 쓰였다.
지하 갤러리 한편에 자리 잡은 텔레비전은 이 집에 살던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준 오랜 벗이었다.
지은 지 25년 된 빌라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친환경 디자이너 정순구 작가
공간, 다시 쓰이다
시간이 흐르면 누구든 떠나게 마련이다. 철근과 콘크리트가 전부인 텅 빈 공간. 사람들은 떠났지만 삶의 애환은 고스란히 남겨졌다. 작은 방이 다닥다닥 붙은 집에서 우리 이웃들은 오순도순 자식을 키우고, 살림을 불려나가는 재미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고만고만한 형편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희망도 키워갔을 것이다.
작가는 그 소박하지만 빛나는 삶의 공간이 가진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연속성을 이어가기 위해, 원래 주인들이 남기고 간 것들을 버리지 않고 거둬들였다. 그렇게 ‘발견’한 물건들을 고쳐 다시 써 새롭게 했다. 카페 일층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라면, 그 아래층은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지하 갤러리 한편에 자리 잡은 텔레비전은 이 집에 살던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준 오랜 벗이었다. 공사를 하면서 나온 전선줄은 삶이 씨실과 날실로 엮이듯 한 폭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있던 것은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공간에 스민 기억은 한번 지우면 다신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보통 사람들의 삶이 흐르던 공간은
지금 커피 향기로 가득 차 있다.
‘스페셜티’ 부산에서 인천으로 상륙
그렇게 ‘크로마이트 커피’는 시간의 흔적 위에 시대의 감각을 덧입히며 나날이 새로워졌다. 그 낯설면서도 매력적인 공간은 젊은 층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SNS에 ‘인증샷’을 남기기 좋은 카페로 알려지면서, 인천은 물론 멀리 다른 도시에서도 원정 오기 시작했다.
직접 로스팅하여 제대로 내린 커피 맛으로도 소문이 났다. 크로마이트 커피의 강점은 ‘스페셜티 커피’다. 부산은 카페 문화가 발달한 서울보다도 스페셜티 커피가 한 수 위라고 한다. 제대로 된 커피가 부산에서 인천으로 공간 이동을 한 것이다.
크로마이트 커피는 전문가들뿐 아니라 일반 손님들의 입맛에 맞는 스페셜티 커피를 제공한다. “손님들이 공간과 커피 모두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원하는 것을 맞춰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바리스타가 아무리 좋은 커피를 내린들, 마시는 사람이 느끼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으니까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이 흐르던 공간은, 지금 짙은 커피 향기로 가득 차있다. 겨울 한가운데, 꽁꽁 언 두 손으로 따스한 찻잔을 감싼다. 가슴 깊은 곳까지 온기가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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