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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꽃 피우고 싹을 틔우는, 뿌리 깊은 나무
오늘 꽃 피우고 싹을 틔우는, 뿌리 깊은 나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있다. 고려시대부터 1,200년 가문을 이어 온 인천 이씨와 400년 역사의 영일 정씨 등 인천의 전통 있는 가문을 찾았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속 깊은 물음을 가슴에 품고, 흔들림 없이 가문을 지탱하는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큰 나무는 오늘도 뿌리를 굳게 내리고 새잎을 틔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도움말 최정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인천에 굳게 뿌리내리고 흔들림 없이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 우리 시는 ‘인천 가치 재창조’ 사업의 일환으로 전통 있는 가문을 찾아, 오늘 역사를 알리고 있다. 인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와 300년 이상 인천에 뿌리내린 가문이 그 자랑스러운 얼굴들이다.
인천에는 인천 이씨(仁川李氏)와 부평 이씨(富平李氏) 등이 인천을 본관으로 1,000여 년째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인천 이씨는 당나라 황제에게 성을 받은 신라 외교관의 후손들로 연수구 일대에 터를 잡았다. 부평 이씨는 조선시대 판서를 다수 배출하고 인천 연수구, 부평구, 남구 일원에 뿌리내렸다. 또 다른 인천 본관 성씨인 강화 노씨(江華魯氏)는 700여 년을, 강화 교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600년 역사를 이어왔다. 전주 이씨(全州李氏) 완풍대군 안소공파는 1919년 계양구 황어장터 만세운동 때 일제에 맞선 기백이 넘치는 가문이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 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 전기 문신인 허암 정회량 선생의 후손인 해주 정씨(海州鄭氏) 우후공파 가문은 450여 년을 검암동 일원에서 살고 있다. ‘허암 정회량 유허지’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8호다.
인천 이씨
고려시대 ‘로열패밀리’
도심 한가운데, 시대가 앗아간 옛 풍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 원인재(源仁齋). 이 안에선 시간도 발길을 멈춘다. 원인재(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는 이허겸(李許謙)을 중시조로 하는 인천 이씨(인주 이씨, 경원 이씨)의 재실이다.
19세기 초에 지어진 원인재는 원래 지금의 인천여고 자리인 신지 마을에 있었다. 하지만 주변이 택지로 개발되면서, 인천 이씨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 1994년 지금의 자리로 재실을 옮겼다. 이허겸의 33세손 이준상(82) 어르신이 그 큰일을 맡았다. “대종회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처음엔 덜컥 겁이 났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문을 위해 보람된 일을 한다는 게 뿌듯했지. 전국의 재실을 다 찾아다니면서 공부하고, 한옥을 짓는 목수들과 강원도 평창까지 가서 나무를 가져다 집을 지었어. 한 5년 걸렸지.”
원인재는 전통적인 양반 사대부 집 양식에 따라 지은 다섯 채의 가옥과 네 개의 문으로 이뤄져 있다. 원인재는 동재인 승휴당(承休堂) 앞에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그 앞마당 왼쪽으로는 관리사인 명인당(明仁堂)을 두었다. 돈인재(敦仁齎)가 마주 보이는 곳엔 정문인 경선문(景善門)이, 왼쪽으로는 후문인 첨소문(瞻掃門)이 나 있다. 가옥과 묘역까지 둘러져 있는 기와 담장이 운치를 더한다. 기품 있으면서도 소박한 모습에서 겸양의 미덕을 본다.
인천 이씨는 당나라 황제에게 성을 받은 신라 외교관의 후손들이다. 이허겸의 조상인 허기(許奇)는 신라 경덕왕 15년인 755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길에 오른 현종(玄宗)을 호위하고 황제의 성인 이(李)씨 성을 하사받았다. 경덕왕은 그를 크게 칭찬하며 미추홀 땅을 주고 소성백으로 명했다.
지금은 바다가 메워졌지만, 이허겸의 묘역은 갯벌 한가운데 있었다. 간치도(看雉島), 우리말로 ‘까치 섬’이라고 불리던 언덕은 하루 두 번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됐다. 이곳은 연화부수지(蓮花浮水池), 즉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으로 풍수지리 명당이다. 인천 이씨는 이곳에 조상의 뼈를 묻은 후로 고려시대 최고의 가문으로 번성했다. 손자 이자연은 재상이 되고, 고려 11대 문종(1046~1083)부터 17대 인종 4년(1126)까지 외척으로 큰 권력을 누렸다. “인천 이가 세상이었어. 인천 이씨의 몸에서 왕이 넷이나 나왔으니 참으로 대단한 거지. 이 일대가 다 우리 땅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땅 한 평 없이, 할아버지 모시는 무덤만 덩그러니 남았어.”
문학산 주변인 지금의 연수동, 선학동, 문학동 일대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던 인천 이씨는, 지금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후손도 10만 명이 채 안 된다. “이제 나도 떠나야지. 이곳을 지키기엔 너무 늙었어. 앞으로 우리 후손이 자신의 뿌리를 자랑스러워하며 전통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한낱 지나간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운명처럼 한자리를 지키며 가문의 역사를 지켜온 세월. 부침 많은 세상 속에서 고집스럽게 지켜온 전통이 먼 훗날에도 이어지길 바란다. ‘어혁인이삼한구족(於赫仁李三韓舊族)’. “아, 훌륭하구려, 인천 이씨는 한국 역사의 뿌리 깊은 씨족이라네.” 돈인재 기둥에 새겨진 시구를 좇는 할아버지의 눈빛에서 가문에 대한 진한 자부심을 본다.
영일 정씨
조선시대 ‘가문의 영광’
청량산 남쪽 자락에 내려앉은 능어리(陵御里) 마을. 이곳에는 잘 가꾸어진 영일 정씨 묘역과 재실 동곡재(東谷齋)가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인천에 있는 묘역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주변 솔숲의 경치가 매우 뛰어나다. 1995년 원인재 재실을 복원하는 것을 본 영일 정씨 후손들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재실을 만들고, 4년 뒤에 세천비(世阡碑)를 세웠다.
당시 건설업에 종사하던 종친회의 정구익(78) 회장이 가문의 일에 힘을 보탰다. 누구든 나서야 했다. 하지만 철근 구조물을 세우고 시멘트로 ‘공구리’나 쳐봤지, 한옥은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 년여 동안 한옥 짓는 목수들을 만나 묻고 배우면서 함께 재실을 지었다. 나무 하나 깎고 기둥 하나 올리는 데서도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며 온 힘을 쏟았다. “그때 정성을 다한 것이 오늘까지 왔어요. 지금껏 단 1mm도 주저앉은 주춧돌이 없으니, 내가 허투루 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일 정씨가 인천에 터를 잡은 것은, 조선 중기인 1607년 정여온(鄭汝溫)이 아버지 정제(鄭濟)의 묘를 쓰면서부터다. 묘역에는 ‘금시발복(今時發福 : 어떤 일을 할 때에 복이 곧 돌아와 부귀를 누림)’할 명당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효심이 깊었던 선비 정여온은 부친을 모실 명당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마침내 인천 청량산 남쪽 구릉에서 이 명당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가까이에 초가집이 있어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가려 했다. 그때 인기척을 느끼고 밖으로 나온 늙은 부부가 그를 보고는 크게 반기었다. 알고 보니 10년 전 관아에 진 빚을 갚지 못해 마포나루에서 목숨을 버리려 했던 이들로, 정여온이 그들의 빚을 대신 갚아준 적이 있었다. 부부는 여생 동안 그 은혜를 갚기로 하고, 좋은 묏자리를 찾아내 땅을 사둔 채 은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인천에 자리 잡은 영일 정씨 가문을 승지공파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중시조인 정여온의 벼슬이 승지였기 때문이다. 은혜에서 비롯된 좋은 기운 덕인지 이 땅에 뿌리내린 후손들은 대대손손 번창했다. 정구성(86) 어르신이 가문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읊어 주었다. “영일 정씨가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본고장이 바로 동춘동이야. 우리 가문은 1640년부터 줄곧 당당히 벼슬을 누리고 대성을 이뤘어. 그 훌륭한 집안의 조상을 기리고 이 땅을 지킨 게 우리이고.” 정여온의 손자인 정시성은 강원도의 관찰사가 됐고, 증손자인 정석빈은 제주목사를 지냈다. 가문은 판돈령부사를 지낸 정수기, 학남대감으로 잘 알려진 우의정 정우량, 좌의정 정휘량 등도 배출했다. 정치달은 영조의 사위가 됐다. 가문의 영광이 계속됐다.
그러나 400년 깊게 뿌리내린 영일 정씨 가문도 개발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땅을 파고 도시를 세우면서 가문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결국 뿌리를 찾아 돌아온다. “옛말에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언덕으로 머리를 향한다’고 했어요. 동물도 그러한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품고 살 겁니다.” 종친회의 정태송(69) 사무국장은 젊은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태어났으니 그냥 산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곳에 터를 내리는 건 생각도 못 하는 게 또 집성촌 사람들이다. 오늘도 그들만의 도타운 정으로 서로를 감싸며 살아간다. “지금은 도로가 나고 바다가 메워지면서 맥이 끊어져, 가문이 예전 같지 않아요. 허허. 그래도 조상님 은덕으로 모두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 더 바랄 게 없지요.”
영일 정씨 사람들은 현재 가문의 묘역을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정구성 어르신은 “오늘을 있게 한 선인들의 자취가 훼손되는 현실이 안타까워. 이를 보전하는 방안을 시에서 강구해야 해. 우리 집안의 힘만으로 할 수 없어”라며 가문을 대표해 바람을 전했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있다. 바로 지금 우리를 있게 한, 민족의 근원과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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