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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보다 재생, 도시가 살아가는 법
재개발보다 재생,
도시가 살아가는 법
낡은 것은 고쳐 쓸 수 있다. 부수고 다시 만드는 방법만이 능사는 아니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재개발’하지 않아도 ‘재생’시킬 수 있다. 두서없이 도시에 쌓인 기억들을 자산으로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인천이 재생의 방점을 원도심에 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글 김보미 경향신문 기자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셔터스톡
인천역 너머로 보이는 개항장
개항의 역사가 고스란히…
인천 원도심의 가능성
인천은 대한민국 개항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원도심과 최첨단 미래 도시로 설계된 신도시가 공존하는 도시다. 지난 15년여간 송도국제도시 등의 지역에 하늘로 쭉쭉 뻗은 고층 건물을 지어 만든 스카이라인이 인천의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보지 못한 또 다른 축이 있다. 1883년 첫 개항의 역사를 열었던 중구를 중심으로 원도심 곳곳에 남아 있는 ‘시간의 유산’들이다.
우리나라 철도역의 원조인 인천역부터 화교 문화가 응집된 국내 최고의 차이나타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공원인 자유공원, 그리고 1960~1970년대 인천 지역의 유일한 헌책방 골목이자 최근에는 드라마 ‘도깨비’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동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까지 시에서 재생을 준비 중인 구간에는 근대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110년 전에 지은 창고, 알록달록한 벽화로 재단장한 송월동 동화마을, 서민들의 삶의 터전인 신포국제시장 같은 도시의 역사가 배어 있는 공간이 내뿜는 아우라는 상당하다.
일본 개항 무역도시 요코하마의 변신
도쿄 서쪽 요코하마(橫浜)는 일본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 창구였고, 20세기 들어서는 공업 도시로 성장했다. 한국 근대화의 시작점이었던 인천과 닮았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항만, 조선소가 문을 닫았고 화물을 보관하던 창고는 버려진 채 황량한 공간이 됐다. 이에 요코하마시는 1980년대 항구 인근을 현대적으로 재단장하는 ‘미나토미라이21’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도시 재생을 통해 요코하마가 새로운 경제 기반과 문화 시설을 갖춘 도시로 거듭난 것은 근대에 지어진 유럽식 건축물이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아카렝가(赤レンガ, 붉은 벽돌)’라고 불리는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창고는 현대식 고층 건물과 어우러져 요코하마의 보물이 됐다.
도시의 기억과 흔적이 자산… 구도심 재생한 나가하마시
일본 오사카와 나고야 사이 시가현 나가하마시(長浜市)는 과거의 기억과 흔적들을 자산으로 삼아 구도심을 재생한 사례다. 좁은 골목들이 연결된 1.5km 거리는 에도 시대부터 전국의 장사꾼과 돈이 모였고, 산업화 이후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 달에 20만 명이 찾던 곳이다. 그러다 1970년대 유통 환경의 변화로 재래시장이 침체되면서 불빛이 사그라졌다.
도시를 살린 것은 옛 상점가에 남아 있던 근대 건축물들이다. 검은 회반죽으로 벽을 칠한 구로카베(くろ壁), 검은 벽의 건축물이다. 200년 넘게 간장을 만들던 공장과 버려진 교회는 새로운 ‘검은 벽 가게’가 됐다. 여기에 서구의 유리 공예를 흡수하면서 옛 건물과 서구의 유리 제품들이 한데 어우러진 골목이 소문을 탔고, 연간 20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미래와 과거의 공존… 싱가포르 빌딩 숲속 오래된 숍하우스
싱가포르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이국적 풍경으로 도시에 숨을 불어넣었다. 남쪽 탄종파가르와 차이나타운, 카통 빌리지 일대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명소로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1층에 상점이 있고 2층과 3층은 주택으로 사용하는 오래된 목조 가옥들이 큰 역할을 했다. 숍하우스(ShopHouse)라고 불리는 건물들이다.
탄종파가르는 과거 상업의 중심지였지만 신도심으로 기능이 옮아가면서 노후 공간이 됐다. 하지만 정부는 이 지역의 숍하우스를 철거하는 대신 보존하기로 했다. 오래된 숍하우스는 싱가포르의 최신식 고층 건물들과 한 공간에 펼쳐지면서 독특한 볼거리를 만든다. 싱가포르 당국은 100곳 이상의 지역에서 숍하우스를 비롯한 7,000여 채의 옛 건물들을 보존하고 있다.
쇠락한 항구도시가 녹색항구로, 독일 함부르크
독일 함부르크(Hamburg)는 인천처럼 항구 도시다. 유럽 최대 항구가 있고, 도심에 엘베(Elbe)강이 흐른다. 도시를 오가는 물류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화를 받아들인 곳이다. 독일 정부가 ‘엘베를 뛰어넘어’라는 문구를 내걸고 함부르크의 옛 항구 하펜시티(HafenCity)를 ‘녹색 항구’로 재탄생시킨 것은 도시의 역사적 상징성마저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낡고 오염된 구도심은 재개발을 통해 고층 건물과 상점들이 들어섰는데, 그것만으로는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매년 홍수가 났던 하펜시티에 강화문을 설치하면서 반전이 펼쳐졌다. 차수 시설 덕분에 주민 2,000명이 거주하고 기업·국제기구의 본부들도 들어온 도심지가 됐다. 홍수가 나도 문만 닫으면 안에선 또 다른 일상이 펼쳐진다.
인천역 배다리
유럽 재생의 교훈,
주민 참여가 관건
환경이 열악한 유럽의 구도심은 이주자들이 들어와 자리 잡은 곳이 많다. 영국에서 1990년대에 ‘커뮤니티 뉴딜’이라 불리는 마을 재생 움직임이 일어난 것도 이민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던 시점과 맞물려 있다. 주민 참여 없이 이윤을 좇아 이뤄지는 재개발은 오히려 원주민을 몰아내고 지역 격차만 키운다는 교훈을 경험을 통해 얻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1998년부터 2011년까지 20억 파운드(약 3조원)를 쏟아부어 전국 39곳에서 주민이 중심이 된 재생을 시작했다. 특히 커뮤니티 뉴딜 사업은 주거 문제뿐만 아니라 주민 교육과 직업 훈련을 해결할 방안을 제시한 지역 단체에 보조금을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적극적으로 주민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지원을 받은 시민 자치단체들이 사업을 맡아 범죄를 줄이고 뒤처진 학교 교육을 바꾸려 애썼으며 주민이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인천의 원도심 역시 현재 다른 지역보다 주거 환경이 낙후돼 있다. 역사문화보전지구로 지정되거나 고도 제한에 묶여, 대형 개발이나 현대적 건축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원도심 재생이 신도심과 격차를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도 이 지역 주민들의 오랜 불편과 불만을 줄여보기 위함이다.
성공적인 도시 재생을 위해선 그동안 시민들이 바랐던 변화된 도시의 모습이 정책에 반영돼야 한다. 재생 이후 관광객이 증가하는 등 기존 거주민들이 새로 직면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대응도 필요하다.
인천시는 이미 행정이 주도하는 대규모 도시 개발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공청회, 토론회를 거쳐 주민들의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새로운 도심 공간에 투영된 인천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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