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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씨앗 뿌려진 자유공원
‘임시정부’ 씨앗 뿌려진 자유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는 제국주의의 흔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려는 힘찬 몸부림이 있었다. 1919년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는 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려는 이 땅의 주인들이 펼쳤던 응전이었다. 이 회의는 홍진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지사들이 정부수립을 목표로 인천의 만국공원에 모여 3·1독립운동 이후 고양된 독립의식을 바탕으로 식민통치를 종식시키기 위해 회합을 가진 사건이다. 만국공원의 역사성을 제국주의시대 건축물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조명할 수 있는 구체적 사례이다.
글 양윤모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
만국공원 안의 존스톤 별장
현재의 자유공원 광장
독립투쟁의
자랑스러운 기억
인천(제물포)은 조규에 따라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1883년 개항했다. 부산이 일본인의 전관거류지 설치로 일본인에게 독점적 지위를 안겨주었다면, 인천은 청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이 공동으로 거류할 수 있는 국제적 개항장이었다. 최첨단의 서구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최초의 만남 장소가 되었다. 각국 조계지역은 외국인들의 별장과 사교적인 공간들이 들어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중 1888년 응봉산 일대에 조성된 만국공원은 한국 최초의 공원으로 유명하다.
자유공원은 처음에 각국공원으로 명명되다가 만국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계제도가 철폐된 1924년 이후에는 서공원으로, 그리고 1957년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동상이 건립되면서 자유공원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명칭의 변화는 바로 만국공원의 역사, 나아가 인천의 역사, 그리고 한국 근대사의 격변과 굴절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만국공원에는 우리가 겪었던 아픈 기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독립투쟁의 자랑스러운 기억도 함께 존재한다. 일제 식민통치기를 독립투쟁기로 설명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였고, 3·1독립운동으로 확산된 ‘정부수립운동’의 구체적인 최초 사례를 만국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13도 대표자 회의’가 바로 그것이다.
상해임시정부와 임시 의정원 요원들
인천 내리에서
상점 철시 운동
1919년 3월 1일,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경기도(당시 인천이 속함) 내에만 25개 지역에서 303회에 걸쳐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참가 인원은 6만8,100명, 이 중 사망자는 1,409명, 부상자는 2,677명, 체포자는 4,220명에 달하였다. 전국적으로 볼 때, 길게는 3개월여 동안 전개된 3·1운동은 인천 지역에서도 많은 민중의 참여하에 전개되었다. 특히 인천은 일본 동경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의 경과가 국내로 전달되는 통로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인천 내리(현 중구 내동)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는 김삼수(당시 19세)와 외리의 객주집 사환인 임갑득(당시 16세) 등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상인들이 상점을 폐쇄하는 등의 항쟁을 하고 있음에도 인천 내에서는 아무도 상점 철시 등의 움직임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겨 격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4월 1일부터 3일까지 이들은 3차에 걸쳐 ‘인천의 체면상 점포를 닫지 않으면 최후 수단을 취하겠다’ ‘인천에 있는 상업가가 폐점하지 않으면 인천 시가는 초토화될 것이다’ ‘속히 폐점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취할 것이다’ 등의 협박문을 인천 외리의 이복현 등 16개 점포와 동부 내리 장지섭 외 여러 곳의 점포에 투입하여 상점 철수와 폐점을 강요하다가 체포되었다. 당연히 일제에 의한 인천 지역의 경계는 그만큼 삼엄하게 전개되었다.
엄지손가락에
흰 종이를 매시오
무엇보다도 인천 지역이 3·1운동과 관련하여 발언권이 있다면, 그것은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결과물인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집합지였다는 점이다. 4월 2일 오후, 만국공원에서 개최되었다는 ‘13도 대표자 회의’가 그것이다. 이 회의는 3·1운동 기간 국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유일한 사전 협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른바 ‘한성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만국공원 집회가 갖는 의미는 간단치가 않다.
한성정부 관련 인물들의 신문 조서 및 공판 시말서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 본다. 먼저 3월 상순쯤부터 홍진과 이규갑을 중심으로 정부를 수립하려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다. 3월 상순 경 홍진은 자신의 집에서 한남규에게 임시정부 조직에 대해 설명을 하고 동의를 얻는다. 이어 3월 20일경 한남수는 홍진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독립운동의 각 단체를 모아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독립에 대한 협의를 위해 각 단체의 대표자가 인천 만국공원에서 회합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찬동하였다. 또 3월 31일과 4월 1일 이규갑은 안상덕에게 만국공원에서 회합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각 방면의 대표자로 참석해 줄 것을 권유하였다. 3월 중순 경 이규갑은 김사국에게 한남규와 함께 국민대회를 조직하고자 하니 가입할 것을 권유하였다. 홍진은 3월 말쯤 인천에서 김규(김교훈)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김규는 홍진에게 국민대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고자 각지의 대표자들을 인천 만국공원에 모이게 하였는데 유교계의 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인적 연락망과 관계망을 통해, 4월 2일 오후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한 상태에서, 상호 인식을 위해 엄지손가락에 흰 종이나 헝겊을 감아 일면식이 없는 사이에도 서로 알게 하는 등의 방법을 취하였다. 만국공원의 회합에서는 임시정부의 조직, 파리평화회의에 대표 파견, 그리고 국민대회 개최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어 4월 8일 이전 어느 날 서울 한성오의 집에서 홍진, 이규갑, 한남수, 김시국 등이 모여 임시정부 및 국민대회에 관한 구체적인 토의를 하였다.
임시정부 시절의 홍진 선생
인천 관교동에 있던
홍진 선생의 묘와 비석
독립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성과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13도 대표자 회의’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3·1독립운동으로 고양된 독립의식으로 국내외 각지에서는 독립정부수립운동이 일어났다. 국외에서의 정부수립운동이 일제의 감시망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국내에서의 정부수립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감시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3·1운동이라는 전 민족적 독립운동이 전개된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이럴 때, 홍진과 이규갑을 비롯한 지사그룹은 3월 상순경부터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에 따라 은밀하게 동지를 포섭하였고, 그 결과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대표자 회의를 열게 되었다. 이 회의는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독립정부를 수립하려는 의지를 가진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최초의 회합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조직이 결정되었고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가 결정되었으며,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이 결정된 회의였다.
여러 가지 다른 성향에도 불구하고 만국공원 회합 참석자들은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수립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 속에서 계획과 추진 그리고 결과를 보았다는 점은 독립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성과라고 하겠다. 이러한 정부수립운동에 인천의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대표자 회의가 중심에 있었다는 점이 바로 만국공원의 역사적 의미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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