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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물 체게바라’ 꿈꾸는 싱어송라이터 강헌구

2018-03-29 2018년 4월호


‘열우물 체게바라’ 꿈꾸는 싱어송라이터 강헌구

사진 김보섭 │ 글 유동현



이태 전쯤 십정동 골목을 다니다가 담벼락에 붙은 낡은 포스터 한 장을 보았다. ‘열우물 재개바라 콘서트’. 동네 가수 ‘강헌구’도 출연한다고 적혀 있었다. 기발한 콘서트 이름과 마을 축제 무대에 설 그 동네 가수가 궁금했지만 이미 철지난 포스터였다. 지난해 연말 부평역사박물관에서 열린 ‘부평 마지막 달동네 열우물연가’ 토크콘서트에서 그 동네 가수를 봤다. 그는 자신이 만든 십정동 관련 노래 몇 곡을 불렀다.
강헌구(35) 씨는 1983년 동인천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십정동으로 이사 오면서 산동네와 인연을 맺게 된다. 언제부턴가 동네 이름을 ‘열우물 마을’이라고 달달하게 풀어서 부르고 있지만 그곳의 삶은 산비탈 길만큼이나 구불거렸고 가팔랐다. 주민들은 1960~70년대 인천 도심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거나 주변 산업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1986년 그 달동네에 해님이 떴다. 일 나간 부모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는 해님놀이방과 해님공부방이 생겼다. 어린 강헌구도 이곳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집안 형편이었다. 그는 ‘돌아온 연어’가 되었다. 후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해 해님방에서 5년 동안 아이들의 선생님이 된다.
그는 인천고 재학 시절 학교 밴드에 들어가 기타를 쳤다. 지역 청소년 밴드 선배들을 통해 연주는 물론 곡 쓰는 법도 어깨 너머 익혀 갔다. 부천에서 데뷔해 본격적으로 홍대, 신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까지 습작을 포함해 30곡을 만들었고 앨범을 두 번 냈다.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그를 다시 만난 날은 공교롭게도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그 어느 곳보다 큰 달이 떴을 그 달동네를 함께 찾아갔다. 십정동 216-159. 그가 30년 동안 살았던 집주소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빈집을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 세간살이 다 나가고 마구 헝클어진 흔적을 보기가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골목으로 작은 창이 나있고 다락이 딸린 작은 방이 그의 둥지였다. 그 또한 재개발로 인해 얼마 전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멀리 가진 못했다. 십정동 끝, 경계에 짐을 풀었다. 그는 이곳에 많은 아파트가 들어서도 못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가난한 무명 가수에게는 언감생심일 뿐이다. 꿈이 뭐냐고 물었다. 러시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에 가서 인천을 담은 노래로 버스킹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는 노래로 저항한다. 불평등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노래한다. 지난 4년 동안 매년 초겨울 ‘재개바라 콘서트’를 기획하고 진행해 왔다. 인천 출신 가수 이권영을 비롯해 홍대 식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재개바라’는 재개발되는 십정동을 빗대어 그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를 보니 문득 체게바라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살던 우물 많은 우리 동네 / 다들 가난했지만 정은 많았었지 /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사람들 / 이제 몇 집 안 남아 그 자릴 지키고 있는데 / 모두 떠난 자리에 우리 집도 낡았고 / 무너진 저 집처럼 점점 더 가라앉고 있는데 / 언제가 될지 몰라 여길 나가야 하는 것도 / 정들었던 우리 동네 모두 다 떠나야겠지 언젠가는.
(강헌구 작사 작곡 ‘열우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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