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조기 돌아가던, 빛나던 그 시절로
때론 오래된 것이 더 새롭고 아름답다. 인천은 과거와 미래가 조화로운 도시, 최초와 최고가 공존하는 도시다. 시간의 흔적을 온전히 보듬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으로 들어가 본다. 그 일곱 번째로 직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던, 그 옛날 강화의 영광을 다시 꿈꾸는 조양방직 ‘신문리 미술관’을 찾았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 대행 |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다시 찾은 폐허, 새로운 시작
“꼭 기억해 둘게요. 다시 만나는 날,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예쁘게 만져놓을게요.” 지난해 가을 유난히도 맑던 어느 날, 옛 조양방직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오늘 다시 찾은 폐허에는, 그의 약속대로 스러져가던 건물이 아름답고 거대한 작품으로 거듭나 있었다.
“건물이 ‘살려달라’, ‘도와달라’ 말을 걸었어요.” 이용철(53) 씨는 지난해 초 고철이나 조금 건져볼 심산으로 처음 조양방직 터를 찾았다. 지인이 좋아할 만한 곳이 있다며, 한사코 같이 가자고 손을 이끌었다. “이 양반이 미쳤나. 누굴 죽이려고. 안 본 걸로 합시다.” 보는 순간, 정신이 아찔하고 숨이 턱 막혔다. 당시 공장 터는 쇠파이프와 쓰레기 더미에 뒤덮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은 다 무너져 내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몸체는 등나무 덩굴이 옥죄듯 휘감고 있었다.
그 후로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옛 공장 터가 머릿속에 떠오르더니 사라지지 않았다. ‘한 번만 더 가보자.’ 그렇게 다시 찾은 폐허에서 그는 시간의 연속성이 낳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묵묵히 세월의 무게를 떠받들고 있는 트러스 구조의 이끌림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결국 ‘그래, 같이 가보자’ 결심을 했다.
- 같은 공간, 같은 사람, 다른 시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절했다. “이 건물만 찍으세요. 나는 이곳을 주물럭거리다 가는 사람이지만, 여긴 영원할 테니까.” 결국 그의 ‘귀한 손’만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오늘, 그는 얼굴에 초점을 맞추길 허락했다.
스러지기 직전, 새 숨을 불어넣다
“그래서, 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공사 첫날, 조양방직 터를 찾은 인부들의 넋 나간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다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했다. 햇볕 한 줌 비집을 틈 없는 짙은 어둠 속,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먼지를 털어내자 낡은 건물이 힘없이 바스라졌다. 먼저 주저앉은 기둥을 일으켜 세우는 작업이 이어졌다. 망치질을 거듭할수록 등골에 진땀이 쭉 솟았다. 다들 무서워서 일을 못하겠다며 진저리를 쳤다. “마치 귀신이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어둠 속에서 지붕이 기둥도 없이 멀쩡히 솟아 있었으니까요. 이제껏 건물 몸체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습니다.”
- 새 숨을 튼, 오늘
- 옛 조양방직.
이끼가 움트던 폐허에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지고,일 년 후 ‘신문리 미술관’으로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널 살리겠다’ 결심하고, 계절이 네 번 바뀌었다. 그동안 가장 추운 날도 가장 더운 날도, 단 하루를 쉰 적이 없다. 몸무게가 8kg이나 줄었다. 마스크가 새까매지도록 쇳가루와 묵은 먼지를 털어낼 때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적으로도 그랬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 컸어요. 명이 한 이삼 십 년은 준 것 같아요.” 힘없이 내뱉는 그의 말에 그간 홀로 짊어진 고단함과 무게감이 느껴진다.
- 조양방직 ‘신문리 미술관’은 이용철 씨가 20여 년간 중국과 유럽에서 찾은 골동품으로 채워져 있다.
조양방직은 일제강점기인 1933년, 강화도의 실업가 홍재묵과 홍재용이 세웠다. 조양방직이 문을 열면서 강화의 직물산업은 가내수공업에서 기계화로 바뀌면서 몸집을 키웠다.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들고 직물 짜는 기계가 밤늦도록 돌아갔다. 하지만 1990년대 현대식 섬유 공장이 생기고 신소재 섬유가 나오면서, 강화 직물산업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조양방직도 가동을 멈추고 제 기능을 잃은 채 멈춘 시간 속에 갇혔다. “세월의 풍파에 스러지던 건물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나를 만났어요. 여기서 잘 가다듬어 손질하면 진화하지만 아니면 폐허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먼지를 탁탁 털고 묵은 때를 벗겨내니, 감춰져 있던 거대한 예술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어요.” 다시 태어난 조양방직의 새 이름은, 그래서 ‘신문리 미술관’이다.
- 조양방직의 벽면 ‘본래 건물을 만든 이와 파괴적인 시간이 낳은 예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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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광, 꿈꾸다
공사가 아닌 ‘발굴’하는 심정으로 망치질을 했다. 흙 한 톨도 그대로 버려지는 일 없도록, 원형 그대로를 살려둔 채 비우고 채우는 과정이 이어졌다.
“건물이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졌어요. 이곳을 만지면서 무언가를 부수고 바꾸는 일이 굉장히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어디 하나 애정 어리지 않은 곳이 없지만, 가장 마음이 가는 건 입구 가까이에 있는 귀퉁이 벽면이다. 공사 도중 허물어져가는 이 벽을 발견한 순간, 바로 울타리를 쳐 더 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 공간에 ‘본래 건물을 만든 이와 파괴적인 시간이 낳은 예술품’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아요. 몇 십 억짜리 그림이 안 부러워요.” 한 예술가는 지금까지 본 전시 작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이라고 감탄했다.
강화 직물산업은 1970년대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조양방직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직물 공장이 밤낮으로 움직이면서,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던 웸블리 넥타이와 ‘강화 소창’을 쏟아냈다. 하지만 부침의 세월을 숨차도록 넘은 끝에, 기계는 멈추고 사람은 모두 떠났다.
“살아생전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옛 건축물은 본 적이 없어요. 이 일대가 계속 호황을 누렸다면, 이 건물은 살아남지 못했겠지요.” 모든 일에는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다. 모순적이지만 내리막이 있었기에 속도가 앗아갈 뻔한 풍경을 지금껏 붙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새 숨을 튼 조양방직은 직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던 그 옛날 강화의 영광을 다시 꿈꾼다.
- 느닷없이 서울에서 나타난 한 사내가 강화의 ‘역사’를 살렸다. 그가 없었더라면 조양방직도 그 주변을 둘러싼 빌라촌과 같은 처지가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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