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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고택에 움튼, 백 년 서점의 꿈
백 년 고택에 움튼,
백 년 서점의 꿈
때론 오래된 것이 더 새롭고 아름답다. 인천은 과거와 미래가 조화로운 도시, 최초와 최고가 공존하는 도시다. 시간의 흔적을 보듬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으로 들어가 본다. 강화도 남문안길에는 100년 된 한옥 ‘대명헌’이 있다. 최근 젊은 부부가 그 집 한편에 작은 서점을 냈다. 오래된 집처럼 긴 시간 책방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꿈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해질녘의 ‘대명헌’.
한 지붕 아래 ‘그 여자의 그릇 가게’와
‘그 남자의 서점’을 품고 있다.
백두산 잣나무로 지은 집
느리게 걷고 깊이 파고들수록 아름답다. 수더분한 땅 빛,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100년이 훌쩍 넘은 고택, 마을을 감싸 도는 좁은 길에선 시간조차 가던 길을 멈춘다.
세상의 속도를 따르지 않고 긴긴 이야기를 간직해 온 땅. 강화도 남문 안길을 걷다가 고풍스러운 가옥 앞에서 발걸음이 멎는다. 강화도 천석꾼 황국현의 집이었던 ‘대명헌’이다. 강화읍에는 1900년대 초에 지은 근대 한옥들이 아직 건강한 숨결을 내뱉고 있다. 1928년에 지은 이 집은, 부잣집답게 당시 할 수 있는 호사를 다 누렸다. 백두산에서 잣나무를 베어와 대들보와 서까래를 올리고, 창틀과 문틀, 마루, 문간을 하나하나 다 짜 맞췄다. 산림을 벌채하는 권한이 일본에 있을 때였다. 머나먼 북쪽 땅의 나무를 베어 인천항을 거쳐 강화도로 들여오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그로부터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집은 새 주인 잘 만나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집도 한때는 높다란 담장 안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갔다. “40여 년 동안 비어 있었어요. 사람이 떠난 자리에 큰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온 집안에 넝쿨이 둘러쳐졌지요.” 도예가 최성숙 씨는 7년 전, 비어 있던 이 집을 발견했다. 그는 폐허 속에서도 빛나는 옛것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햇살이 기와지붕을 뒤덮고 있었어요. 어찌나 견고하고 아름다운지 순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답니다.” 빛바래고 군데군데 기와가 깨져 나갔지만 그 자체로 멋스러웠다. 그 지붕이 뭐라고, 40여 년 동안 비어 있던 100여 년 된 집을 덜컥 샀다.
그 여자의 그릇 가게
그 남자의 서점
“외국은 건물에 서점이 들어서면,
그 건물주가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대요.”
백 년 서점을 향한 부부의 꿈이, 백 년 고택에서 무르익고 있다.
시간을 거스르는, 한국의 아름다움
지붕만 온전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니 안방과 사랑방 지붕이 무너져 흙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정도야 손볼 수 있지 않겠느냐’ 용기를 냈다. 흙은 걷어내고 원래 있던 기와를 가져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쌓아올렸다. 회복하는 데만 4년이 걸렸다. 이후로도 계속 쓸고 닦아 6년이 지난 이제야 겨우 모습을 갖췄다.
“10년은 잡고 있어요. 처음엔 허물어져 가는 집이 안쓰러워 살려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공간에 새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잃어버린 역사의 페이지를 하나씩 찾는다는 생각으로 집을 매만지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 누가 와도 ‘이것이 바로, 한국의 아름다움’이라고 자신 있게 내보이고 싶다.
비바람을 견뎌온 세월만 백여 년이다.
오래된 집에서 역사를 기억하고 내일을 열어가는,
집주인 황성숙 씨와 김혜지, 박서연 부부.
삼 년 전, 강화도 남문한옥에서 사랑을 싹 틔운 연인.
오늘 그 안에서, ‘그 남자의 서점’과 ‘그 여자의 그릇 가게’를 열고
둘만의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 열려 있던,
황 부잣집 마당의 우물.
겨울 한가운데, 연인을 품어주다
2015년 달력이 한 장 남은 어느 날, 한 젊은 남녀가 이 집을 찾았다. 서울 아가씨 김혜지(32) 씨는 강화도 청년 박서연(34) 씨를 만나기 위해, 처음 강화 땅을 밟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이나 달려왔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남자친구가 한겨울에 자전거를 타고 마중을 나왔다. 처음 하는 데이트였다.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그냥 걷자고 했다.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남문을 보는 순간, 꽁꽁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렇게 고즈넉한 풍경이 도시 한가운데 펼쳐질지 몰랐어요.”
둘은 남문안길을 걷다 한 오래된 가옥의 문을 두드렸다. 이 집을 세운 황 씨 집안은 방직공장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배재학당을 짓고 독립군을 지원했다. 1947년에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기도 했다. 마음씨 좋은 주인이 집 구경을 시켜주고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인심 좋게 안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감을 따서 건네주었다. 쓰윽 문질러 베어 무니 달콤함이 입안에 가득 찼다. 이후 두 사람은 만난 지 1년 되는 때 결혼을 했다. 낭만적인 첫 만남을 이뤄준 이 집에서 기념 촬영을 해 추억의 책갈피에 가지런히 꽂아두었다.
그리고 오늘, ‘그 남자의 서점’과 ‘그 여자의 그릇 가게’를 열고 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
부부가 100년 고택에 서점 문을 연 지, 이제 두 달이 됐다. 세상을 하얗게 밝히고 싶어 이름을 ‘소금빛’으로 지었다. 책 파는 걸로는 돈이 안 되니 먹고살기 위해 그릇 가게도 함께 냈다. 벌써 동네 사람은 물론이고 관광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아이는 책을 읽고, 엄마는 그릇을 고르고, 아빠는 잠깐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붙인다. 조금은 게을러도 되는 시간이다. 모처럼 마음이 여유롭다.
“사람들이 책장을 넘기며 삶의 가치를 발견하면 좋겠어요. 그래서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진다면, 그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요?” 남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책방에서 책을 고르던 추억을 잊지 못해 서점을 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합일초등학교 앞에서 ‘가망불망’이라는 서점을 꾸렸다. 그 이름은 ‘잊어도 될 것과 잊어서는 안 될 것’을 뜻한다. 살다 보면,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불안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책만큼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있을까.
“처음 강화도로 와 서점을 열었을 때, 100년 넘게 지키는 게 꿈이었어요. 이 집으로 와 자연스럽게 100년 서점이 되었으니, 더 긴 시간을 이어가야죠.” 고택에 스민 종이 향이 그윽하다.
information
소금빛 서점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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