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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채집한 그 소리, 이미 역사입니다”
“방금 채집한 그 소리,
이미 역사입니다”
안병진 경인방송 PD
사진 김보섭 │ 글 유동현
물때 맞춰 모여든 사람들, 하나같이 바다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오후 2시 30분, 척후병을 자처한 갈매기의 울음이 요란해진다. 갯골 따라 물이 슬금슬금 들어오고 있다. 갯물은 고깃배들을 밀고 온다. 부둣가에 밧줄을 매자마자 선상은 발 디딜 틈이 없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아우성이 한낮 포구에 가득하다. 오늘도 북성포구는 난장(亂場)이다.
그 순간, 비릿한 날것으로 꽉 찬 아수라장을 담는 사내가 있다. 그는 도심의 후미진 포구에서 벌어지는 반짝 ‘선상 파시’를 소리로 담고 있다. 헤드폰을 끼고 털 달린 마이크(wind jammer)를 양손에 든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사운드 엔지니어 유지태다. 경인방송 프로듀서 안병진(42) 씨는 요즘 ‘소리 채집꾼’으로 통한다. 2년 전쯤 그는 시청 사무실을 찾아와 필자의 책 몇 권을 얻어 갔다. 그 시점이 인천의 소리를 활자에서 찾아 나설 즈음이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소리에는 온도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추출해 낸 기억의 일부인 ‘소리’가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됩니다.” 눈보다 귀가 열렸던 시절이 있었다. 항구의 뱃고동 울림, 골목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 새벽 시간 교회 타종, 행상의 외침, 심야 라디오 방송…. 어느덧 우리는 소리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
안 PD는 소리 채집을 위해 지난해 섬에서 살다시피 했다. 굴업도 개머리언덕을 타고 넘는 바람 소리를 비롯해 백령도 두무진 바다 속 해녀 물질 소리, 콩돌해변의 자갈 구르는 소리 등을 담았다. 올해는 육지의 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인천역 뒤 화물열차 소리, 자유공원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 수인곡물시장 참기름 짜는 소리, 연안부두 수산물시장 경매 소리, 내리교회 종소리, 강화 소창 짜는 소리 등 20개가량을 채집했다.
관심 밖의 소리는 ‘소음’일 뿐이지만 자신의 추억과 어우러지면 그 소리는 시간을 일깨우는 ‘음악’이 되기도 한다.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그가 연출하는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을 통해 채집한 소리를 청취자에게 들려준다. 올드 미디어로 치부되는 라디오, 그것도 지역 라디오 방송에 귀담아들을 청취자는 몇이나 될까. 그는 라디오 전파를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인천의 소리를 주제로 한 캠페인도 함께 펼치고 있다. 악전고투, 고군분투하는 이 부분에서는 영화 ‘라디오 스타’가 살짝 연상된다.
“조금 전 잡은 소리는 이미 그 소리가 아닙니다. 또 다른 소리입니다. 시간을 타고 간 그 소리는 추억이자 ‘역사’입니다.” 포구의 난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순간 이미 우리 곁을 스쳐 지난 것처럼 지상에 있는 모든 소리는 그곳, 그 시간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소리의 기록화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훗날 자신이 담아낸 인천의 소리들이 박물관의 ‘유물’이 될 것이라 내심 기대한다.
그는 학익동에서 태어나 줄곧 인천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광성고를 졸업한 후 성균관대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평생 글만 쓰면서 살고 싶었지만 현실을 깨닫고 언론사 문을 노크했다. 첫 직장은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사였고 이후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을 거쳐 2007년에 경인방송국으로 옮겨왔다.
그는 얼마 전 동구 창영동 배다리 주민이 되었다. 방송작가인 아내와 원도심 골목 산책을 즐기던 중, 40년 된 2층 벽돌집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 면적 15평짜리 협소주택을 오밀조밀 뜯어 고쳤다. 옥상에 오르면 헌책방이 보일 듯 말듯하고 창문으로 옆집 기와 처마가 들어온다. 머지않아 ‘소리 채집꾼’ 안병진의 녹음기에는 집 앞 창영초교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옆집 기와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도 담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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