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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없으면 가족도 친구도 없다고 하셨죠.”
“나라가 없으면
가족도 친구도 없다고 하셨죠.”
독립유공자 노성원의 후손 전경선 씨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학자풍의 할아버지는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말씀하셨어요.
‘만주는 추웠고 먹을 것이 없어 가족들이 고생했다.
하지만 나라가 없는 가족이 행복할 수 있겠느냐’고.
외할아버지는 평소 말씀이 없으셨다. 광야의 소나무 같기도 했고, 흙탕물 위에 피어난 연꽃처럼도 보였다. 몇 마디 하시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술이 몇 잔 들어갔을 때였다. ‘만주는 추웠고 먹을 것이 없어 가족들이 고생했다. 하지만 나라가 없는 가족이 행복할 수 있겠느냐.’ 설날, 추석과 같은 명절이 오면 고향 평안북도 선천을 떠올리기도 했다. ‘두고 온 내 고향의 봄이 그립구나. 그 맑은 냇물과 봄이면 흐드러지던 들꽃들이….’
“온종일 소반 위에 책을 펴 놓고 계셨어요. 요즘 말로 ‘소확행’이라고 하나? 할아버지는 그저 내 나라, 내 땅에서 마음 놓고 숨 쉬고 살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시며 하루하루를 지내시는 것 같았지요.”
105인 사건 연루, 임시 정부 지원, 신간회 활동 등의 독립운동을 한 노성원(1897~1964)의 외손자 전경선(70) 씨 기억에 남은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학자 그 자체였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만주 벌판을 누빈 독립운동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15세의 어린 나이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뒤 꼬박 35년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기력을 모두 소진했던 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광복을 맞으면서 할아버지께선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를 떠나 노량진으로 왔는데 제가 태어나던 1950년 한국전쟁이 나지 않았어요? 난리통에 할아버지께서 저를 업고 부산으로 피란길에 올랐고,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 정착해 저를 키우며 7년 정도 부산 생활을 하셨지요.”
피란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노량진으로 돌아온 건 전 씨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이었다. 사업 수완이 좋은 선친이 수도권에 사업 기반을 잡으면서 외손자를 키우던 장인, 장모를 서울로 모신 것이다.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책과 술을 벗하시다 전 씨가 중학생이 되던 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서울에서 자라고 사업을 하던 전 씨가 ‘인천 시민’이 된 건 지난 1월이다. 대구에서 하던 식료품 매장을 접은 뒤 어디서 노년을 보낼까 고민했는데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인천만 한 곳이 없었다.
“노년에 귀촌, 귀농을 얘기하는 분들이 많은데 쉬운 일이 아니지요. 노인들은 병원, 교통, 복지 시설이 잘 돼 있어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곳이 살기에 좋지. 인천은 인구 300만이 넘는 대도시로 계속 발전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강화도, 영흥도와 같이 주변에 바람 쐬러 갈 곳도 많으니 여기만 한 곳이 또 없는 것 같아요.”
서울에 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연안부두, 월미도, 인천대공원 등에 자주 놀러 다니며 이미 ‘인천물’이 흠뻑 들어 있었다는 전 씨. 그는 서울, 부산, 대구와 같은 전국 대도시에서 살아봤지만 인천만큼 매력적인 도시가 없는 것 같아 인천 시민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털어놓았다. “더 좋은 건 우리 큰딸이 인천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라오, 허허허.”
오래전 외할아버지께서 딸·사위와 가깝게 살았던 것처럼, 할아버지 나이가 된 그 역시 딸이 먹고사는 땅을 여생의 귀착지로 선택했다. 외할아버지께서 나라를 되찾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내가 살고 싶은 도시’로 인천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나라가 없으면 가족도 친구도 없다는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3·1절을 며칠 앞둔 겨울 한낮, 인천대공원에 눈발이 흩날린다. 눈물인가, 진눈깨비인가. 인천대공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을 우러러보는 그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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