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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의 망루 인천
아! 나의 망루 인천
글·조각 김길남 조각가
인천에서 나고 자랐다.
1985년 첫 번째 조각 개인전을 열었으며,
인천광역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지성 42x21x19cm 대리석
오수 33x25x75cm 청동
신흥동 해광사 주변이 어린 시절 나의 주 놀이터였다.
절 언덕을 올라 왼쪽 모퉁이를 돌면 시립도서관이 나오는데, 그 ‘모티(모퉁이의 경상도 방언) 집’이 피란 나와 카메라 한 대와 맞바꾼 첫 번째 우리 집이었단다. 그 시절 그곳은 나의 망루와도 같았다. 또래 친구들과 절 마당에서 야구도 하고 폭죽도 터트리고 때론 코피도 터트렸던. 또 아버지의 사진 모델이 되기도 했던 잊히지 않는 그 많은 시간이 멈춰 서 있는, 아! 나의 망루. 손에 잡힐 듯한 앞바다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한 배 한 배 집어 들던 나의 기적 같은 손을 추억한다. 어찌나 깨끗했던지 티 없이 맑은 풍광이 눈앞에 선하다. 월미, 팔미, 대부, 영흥, 무의, 영종, 자월, 승봉, 이작, 덕적, 연평… 헤아릴 수 없이 길게 이어진 해안선의 끝자락을 더 멀리 보았다고 견주며 우쭐대던 그때 그 인천 대기의 청명함을 기억한다. 늦은 저녁까지 동네 또래들과 땅따먹기, 팔방, 깡통차기, 구슬빠이(구슬치기), 자치기, 비석치기로 정신 팔다 형에게 붙잡혀 들어오던 우리 동네. 여름이면 창영당 아이스케키 망치 아저씨가 “아이스~끼겨~” 하던 걸걸한 목소리와 동네 구석구석, 때로는 배꼽산, 약사암, 송도산 어디든 소풍 장소가 됐던 날을 추억한다.
중고교 시절을 숭의동 집에서 보냈는데 그 2~3년이 우리 가족 간 연대가 좋았던 시간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들과 누나들을 통해 예술과 삶이 밀접할 수밖에 없음을 경험하며 하루를 천년같이 착하고 귀한 막내아들로 보내다가 불현듯 들이닥친 사춘기 기운이 가출로 이어졌고, 독립군이 되어 뜻이 맞는 동지들과 자유공원 모교 후미진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세상 속에 앙데팡당(Indépendant)을 선언했다. 그 시절 우리는 자유라는 히피 문화의 일부인 록 음악, 스트리킹(옷을 입지 않고 달리는 것) 같은 것을 흉내 냈는데, 이 덧없는 시절 친구 없인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며 의리로 똘똘 뭉친 공부와 거리가 먼 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여자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입대, 전차병으로 3년을 마친 후 귀향하니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신포동 대화재로 검게 그을렸던 가게가 멋진 콘크리트 4층 새 건물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미대에 진학하고 중매로 결혼도 하고 신혼살림도 차리게 됐다.
옛 신포동은 인천의 명동으로, 새로운 유행의 발표장 같았다. 키네마, 동방극장, 한국산업은행, 양지공사, 화선장, 미락, 대성제과, 빠씨, 할램, 후생병원, 인천지법원, 미림양장점, 국제경양식, 위스키메리, 방첩대, 인천경찰서, 허바허바사장, 짐다방, 베아뜨리체, 공보관, 인천시청, 그리고 신포시장 안 내가 제일 좋아하던 백항아리집과 뽀얀 감자탕, 무용담을 뽐내던 미아마찌 아저씨들….
1985년 나는 숙명처럼 인천에서의 첫 번째 조각 개인전을 열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과 장소가 모두 여기 인천에 모여 있다. 대학원 졸업 후 지방대 전임 교수로 일했는데, 2년이 지나니 가족 모두 이사를 권유했다. 그곳은 너무도 낯설고 나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이것이 군대 이후 두 번째 타향살이 흔적이자, 나를 인천에 꽉 묶어놓는 계기가 됐다. 30대에 가졌던 조각가로서 창작열과 독창적 발상. 그때는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60대 중반이 된 지금, 그 시절 나의 예술성을 되찾아가는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
달빛 25x10x28cm 청동
풍성이 28x27x62cm 화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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