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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도시 인천, ‘평화수도’로

2019-06-03 2019년 6월호



 
호국보훈의 도시 인천, '평화수도’로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삼별초는 전멸한 걸까.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고려가 개경(개성)으로 돌아간 때는 1270년이다. 몽골의 계속되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강도(江都, 몽골항쟁 당시 강화도 이름)에서 38년을 버틴 고려였다. 그러나 1270년 결국 성을 허물고 개경 환도를 단행한다. 이때 반기를 들며 환도를 거부한 세력이 고려 최정예부대 삼별초다. 고려 정부는 가짜이고 자신들만이 진정한 고려인이라며 결사 항전을 천명한 삼별초는 진도-제주도로 후퇴하며 여몽연합군에 맞서 격렬히 저항한다. 지독하고 끈질긴 3년간의 전투였다.
제주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배수진을 친 삼별초는 1273년 1만2,000여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한 것으로 역사는 전한다. 그런데 1982년 오키나와(沖縄)에서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란 명문이 박힌 ‘고려 기와’가 출토된다. 계유년은 삼별초가 전멸한 1273년. 당시 오키나와는 선사시대로 기와를, 그것도 고려의 그것과 똑같은 기와를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는 제주에서 패퇴한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건너가 새로운 문명과 왕국을 건설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강화도가 전시 수도로 38년간 고려를 지켜낸 이래, 인천은 줄곧 ‘호국보훈의 도시’로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흘러왔다. 우리나라 북부와 남부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육지와 해양을 연결하는 요충지가 인천의 지정학적 운명이었다. 인천은 16~17세기 왜란·호란 당시 왕실보장처로, 19세기엔 병인·신미양요의 격전지로 나라를 지켜냈다. 문화재를 탈취 당하고 엄청난 조선 군인들의 목숨을 내주면서도 중국과 일본도 어쩌지 못한 서구 열강을 인천은 막아냈다.
인천의 수난은 근래 들어와서도 계속됐다. 서해 교전, 천안함 피폭, 연평도 포격과 같은 아픔을 겪으며 인천은 대한민국의 온갖 고난을 짊어진 채 한반도 전쟁의 9할 이상을 치러내야 했다. 인천 시민들은 지금도 분단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 당사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주민 삶의 터전이 남북 접경 지역이다 보니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고단한 생활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인천이 지난해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이끄는 ‘평화도시 인천’을 선언한 배경은 무엇보다 인천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평화도시의 닻을 올린 뒤 인천은 쉼 없는 항해를 해왔다. 광역시 최초로 평화도시 조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남북교류협력 담당관실을 신설했으며 민관 거버넌스 평화도시 조성위원회를 구성했다. 매년 수십억 원의 남북교류협력기금을 축적하고 55년 만에 서해5도 조업 시간을 연장했으며 여의도 면적 84배 크기의 바다를 조업 구역으로 확장하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지난 4월엔 해안선 철책 철거를 시작, 인천 해안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인천이 그리는 미래는 영종도를 출발한 자동차가 강화도를 지나고 남북 다리를 건너 개성과 평양으로 질주하며, 인천항을 출항한 여객·화물선이 해주와 남포, 신의주를 오가는 통일의 길을 여는 것이다. 나아가 인천국제공항에 평양으로 가는 노선을 만들고 송도 스마트시티 같은 도시를 북한에도 조성한다는 꿈을 인천은 꾸고 있다. 머잖아 서해에선 군함이나 불법 중국 어선 대신 남북 어민의 고깃배와 유람선이 떠 있을 것이다. 저 멀리서 ‘평화도시 인천’의 새벽이 동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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