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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파던 소년들을 기리며
굴 파던
소년들을 기리며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소년은 눈을 뜰 수 없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10시간 넘게 중노동을 하다 나왔으니 빛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8월 중순의 태양이 계속해서 소년의 얼굴에 작렬했다. 소년이 실눈을 뜨며 천천히 빛을 받아들였다.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어디선가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소년은 직감적으로 귀향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누군가 굴 안에서 비명처럼 외쳤던 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다. ‘일본이 패망했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주르륵, 동굴처럼 깊고 퀭한 소년의 눈에서 8월의 햇살보다 뜨거운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뒤따라 굴을 빠져 나온 아이들이 엉엉 울며 만세를 외쳤다. 어디서 구했는지 태극기를 든 소년도 눈에 띄었다.
일본의 전쟁 광기가 막바지로 치닫던 1940년대 초중반, 부평엔 수십 개의 굴(지하호)이 존재했다. 미국의 공습을 대비해 일제가 파놓은 지하 시설이었다. 굴을 판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인 학생들이었다. 성인들은 전쟁터에 끌려 나갔으므로, 굴을 파는 일은 조선인 소년들의 몫이었다. ‘강제 징용’ 당한 학생들은 어디인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암석 굴착 작업을 망치나 정 같은 간단한 도구로 해내야 했다. 조선인 강제 징용 소년들의 흔적은 지금도 인천 곳곳에 남아 있다. 산곡동 함봉산을 중심으로 부평에서 24개의 굴이 발견됐으며 긴담모퉁이, 자유공원 입구에도 지하호가 존재한다.
대일항쟁기(1910~1945) 인천은 일본의 식민지 건설 야욕의 교두보였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부평수리조합 설립 등을 추진해 식량과 원료를 수탈한다. 개항장박물관이 된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식량과 금을 일본으로 빼돌리고 일본인에게 토지매입 자본을 공급하는 조선 수탈의 첨병이었다. ‘인천곡물협회’는 조선의 미곡시장을 장악해 쌀을 일본에 반출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인천 사람들은 삶의 터전과 먹을 것을 빼앗기고 유민으로 몰락했다.
인천이 아예 군수 기지로 전락한 시기는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부터다. 1937년 일제는 부평에 초거대 무기 제조 공장 일본육군조병창을 조성한 데 이어 1942년 지금의 부평공원 자리에 일본의 대표적 전범 기업 미쓰비시제강주식회사를 설립한다. 현재 남아 있는 산곡동 영단주택과 삼릉 줄사택은 그 시대의 생생한 증거들이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돼 중노동에 시달렸다.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한 조선인 동원 숫자만 해도 전국적으로 648만여 명에 이른다.
우리나라 대법원이 지난해 “미쓰비시는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한일청구권협정과 별개로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 판결이었지만 미쓰비시는 사과와 배상을 거부해 왔다. 이는 미쓰비시가 2015년 미군 포로 강제노역자 1만2,000여 명을 대표한 제임스 머피에게 사과하고, 2016년 3,765명에 이르는 중국인 강제노역자들과 가족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한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다. 미쓰비시가 당시 베이징에서 사과하고 보상을 약속한 것도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중국 법원에 소송을 낸 데 따른 결과였다.
광복절 74주년을 맞은 8월, 함봉산 굴 안으로 발걸음을 들여놓는다. 질척한 바닥을 걸어 안으로 들어갈수록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굴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물방울이 얼굴에 와 닿는다. 이것은 혹시 굴을 파던 소년들의 눈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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