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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케렌시아, 인천
나의 케렌시아, 인천
글 백형찬
인천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정년퇴직하면 자유공원 기슭에 살면서
인천에 대한 온갖 추억들을 글로 쓰고 싶어 한다.
나는 몸과 마음이 힘들면 인천을 찾는다. 인천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살던 집과 동네 그리고 자유공원을 한 바퀴 돌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케렌시아(Querencia)’라는 말이 있다. 투우장에서 소가 투우사와 사투를 벌인다. 투우사는 소를 쓰러트려야 하고, 소는 투우사를 이겨야 산다. 서로의 목숨을 건 싸움이다. 투우사의 칼이 소 등에 박히면 소는 헐떡인다. 소는 잠시 숨을 고를 곳을 찾는다. 소가 숨을 고르며 마지막 기운을 모으는 곳이 바로 케렌시아다. 그곳은 소에게 마지막 안식처이다. 나에게도 케렌시아가 있다. 바로 인천이다.
해안동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살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살던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 집도 그중에 하나였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정남향 이층집이었다. 넓은 마당에는 오래된 사철나무 정원과 연못이 있었고, 차가운 물이 늘 고이는 깊은 우물과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넓은 광도 있었다.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예쁜 현관 출입문이 있었고, 윤이 반짝이는 넓은 마루도 있었다. 안방에는 멋있게 조각된 나무 기둥과 붙박이 유리장이 있었다. 이층 방은 모두 다다미방이었다. 오래된 담쟁이넝쿨이 집 뒤편 축대를 뒤덮었다. 가을이 되면 마당 감나무에 홍시가 빨갛게 열렸다. 마치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 집처럼 아늑한 곳이었다. 해안동은 유년의 추억을 간직한 집과 골목으로 가득한 곳이다.
자유공원 역시 어릴 적 추억을 가득 품고 있다. 어느 무덥던 여름날, 꼬마는 시원한 얼음과자가 먹고 싶었다. 부모 몰래 송학당이라는 가게에서 아이스케키(아이스케이크, Ice Cake)를 통 가득히 채웠다. 크고 무거운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는 맥아더 동상 앞에서 장사를 했다. 판 것보다는 녹은 것이 더 많았다. 그래서 혼자서 다 빨아 먹었다. 공원에는 인천의 랜드마크인 맥아더 동상이 우뚝 서 있다. 한 손에 쌍안경을 들고 멀리 인천 앞바다를 응시하는 모습이다. 맥아더 장군은 어린 꼬마에게 전설 속 주인공처럼 멋있었다. 동상 옆 벽에는 청동으로 맥아더 장군이 함정에서 내려 장병들과 함께 물속을 걸어 나오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왼쪽 손등이 늘 반질거렸다. 작은 광장을 가로질러 팔각정 쪽으로 가다 보면 길에 관상을 보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갓 쓰고 한복 입고는 곰방대로 담배를 피웠다. 굵은 붓으로 그린 사람 얼굴과 손금 종이가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새장에 작은 새를 넣어두고 점을 보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지금의 제물포구락부 자리엔 인천시립박물관이 있었다. 그곳은 관람객이 없어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입구에 그 옛날 인천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었다. 평화롭고 어진(仁) 인천의 모습이었다. 나는 지금도 인천에 갈 때면 그 아름다운 정경을 떠올리곤 한다. 박물관 안에는 갖가지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붉은 녹의 철기와 파란 녹의 청동기 그리고 석기시대의 크고 작은 돌들이 하얀 솜 위에 올려져 있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새하얗고 커다란 매머드 상아였다. 시베리아에 살았다는 매머드의 상아가 어떻게 박물관에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박물관 뒤편에는 중국 명·청시대의 종과 화포가 즐비했다. 그곳은 우리들의 신나는 놀이터였다. 종 뒤에 숨으며 술래잡기를 했고, 화포에 올라앉아 가위바위보 놀이를 했다. 바닥에 둘러앉아 비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공원 남쪽 기슭에서는 인천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풀밭에 팔베개하고 누우면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함께 보였다. 풀밭에서 놀다가 큼지막한 개구리참외를 발견해 친구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 종종 도마뱀이 풀밭에 나타났다. 장난삼아 도마뱀을 잡기도 했다. 도마뱀을 잘못 잡으면 꼬리가 잘려 나갔다. 잘린 채 움직이는 꼬리를 보며 얼마나 징그러워했는지 모른다. 또한 공원 나무에는 몸집이 큰 청동색 풍뎅이들이 살았다. 풍뎅이를 잡아 얼굴을 거꾸로 돌리면 재밌는 춤을 추곤 했다. 제일교회 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콩벌레도 살고 있었다. 기어 다니던 녀석들을 만지면 몸을 콩처럼 동그랗게 말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계단 아래로 굴리며 놀았다.
지금의 공영주차장 쪽에 토굴 하나가 있었다. 무서운 사람이 살고 있다고 했다. 붙잡혀 들어가 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특히 꼬마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얘기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굴속에 누가 살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또한 자유공원 기슭에서는 그림 대회가 많이 열렸다. 지금은 대불호텔로 복원된 중화루 앞에서 12색 왕자파스로 그림을 그려 상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불에 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오례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그림을 많이 그렸다. 오례당은 한 중국인이 사랑하는 스페인 아내의 청으로 세운 유럽식 저택이었다. 오례당의 스토리텔링은 인도의 타지마할처럼 슬프고도 아름답다. 투구 같은 지붕에서는 묘한 구릿빛 광채가 났다. 1960년대 후반 어느 날, 그 오례당이 불에 전부 타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하던지. 그리고 자유공원 골목에는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집들이 많았다. 그런 집들을 부러워했다. 훗날에 돈을 많이 벌면 꼭 그런 집에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토록 자유공원은 나의 어린 시절 온갖 추억들이 아롱아롱 매달려 있는 곳이다. 인천의 그 오래된 붉은 벽돌들, 그 오래된 계단들, 그 오래된 석축들, 그 오래된 골목들, 그 오래된 플라타너스들… 이 모든 것들이 강한 구심력을 갖고 나를 끌어들인다.
해안동 집에서어머니와 함께
인천의 그 오래된 붉은 벽돌들, 그 오래된 계단들,
그 오래된 석축들, 그 오래된 골목들,
그 오래된 플라타너스들…
이 모든 것들이 강한 구심력을 갖고 나를 끌어들인다.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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