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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재 이야기 ③ 인천우체국

2021-03-02 2021년 3월호

‘100년의 사연’들이 거쳐간 동·서양 혼합 근대건축물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중구 신포사거리 인천항 방면 모퉁이의 육중한 건물이 겨울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정문에 붙은 ‘인천중동우체국 이전 안내’란 플래카드가 가볍게 펄럭인다. 여느 건물과는 달리 정문이 사거리 방면 건물 모서리에 나 있는 것이 독특하다.
정문 위 화강암엔 ‘인천우체국’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거칠게 다듬은 화강암을 기단처럼 처리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2층 벽돌조의 이 건물은 1923년 완공한 ‘인천우체국’(중구 항동6가 1)이다. 2003년 인천우체국이 연수구 신청사로 이전한 뒤 중·동구 지역을 관할하는 ‘인천중동우체국’이 들어왔고, 인천중동우체국마저 2019년 5월 신흥동 정석빌딩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은 비어 있는 상태다.
1982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인천우체국은 그리스 양식의 원형 기둥과 르네상스 양식을 절충한 모습으로 건축한 인천의 대표적 근대건축물이다.
개항 이듬해인 1884년 11월 17일 서울엔 우정총국, 인천엔 분국이 설치된다. 누구나 자유롭게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대적 통신 제도의 시작이었다. 당시 인천분국장엔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임명됐으며 최초의 우표인 문위文位 우표도 발행했다. 인천감리서 안에 두었던 인천분국에서 스탬프를 찍은 것도 잠시, 12월 4일 우정총국 개업 축하연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은 한 달도 못 가 폐쇄된다.
우편 행정이 재개된 때는 11년 뒤인 1895년이다. 이때 서울과 인천에 우체사를 두었는데 인천우체사의 관할 지역은 제물포항 일대와 인천 읍내였다. 인천우체사와 서울우체사에서 각각 출발한 우체부는 하루 한 번 오전 9시 오류동에서 만나 우체낭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우편 업무를 진행했다. 이와는 별개로 일본영사관(1910~1932년 인천부청 건물로 사용) 안에서 인천우편국을 운영하던 일본은 을사늑약 음모를 한창 꾸미던 1905년 5월 인천우체사를 비롯한 여러 우체소를 인천우편국에 통합해 버린다. 이후 우편 업무가 크게 늘어나며 인천부청 안에 있던 인천우편국은 1923년 지금의 자리에 건물을 지어 이전한다.
광복 이후인 1949년 8월 인천우편국은 인천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반세기 넘게 ‘뻐꾸기 우는 사연’과 쌀과 김치 등 부모의 사랑이 듬뿍 담긴 물품을 전해주었다.
2021년, ‘부모님 전상서’는 휴대폰과 이메일이 대신하고 빨간 우체통도 보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인천우체국은 여전히 100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며 지난날의 아픔과 사랑, 눈물과 웃음, 우리네 삶을 속삭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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