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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인천사

2021-03-02 2021년 3월호

인천 지명
꽃도 없고 섬도 아닌 ‘화도진’


화수동에 있는 화도진은 1866년 병인양요 이후 거듭된 외국 함대의 침입에 대비해 고종 16년(1879)에 설치한 군사 기지다. 그때 인천의 북쪽을 맡을 바닷가 군사 기지로 지금의 서구 연희동에 연희진이 생겼고, 남쪽을 맡을 기지로 이곳 화도진이 생겼다. 당시 화도진이 관할한 해안포대는 모두 8개로, 가장 규모가 큰 주안갯골 입구에 6개의 포대를 배치했다. 또 승기갯골과 소래갯골에 각각 호구포대와 장도포대를 설치했다. 이를 통해 지금 만석동의 괭이부리와 북성포, 제물포, 범아가리(호구포) 등지의 바다를 지켰다. 연희진은 지금의 연희동과 원창동, 가좌동 일대의 포대를 담당했다. 당시 서울로 들어가려는 배는 반드시 인천 앞바다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에 이곳에 군사 방어 시설을 만든 것이다. 그때 조정에서는 어영대장 신정희를 보내 포대와 군영을 만든 뒤 화도진이라 이름을 붙였다. 당시 화도진은 남북 방향으로 향하는 언덕 지대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진지에서는 바다를 잘 바라볼 수 있지만 바다 쪽에서는 진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군사 시설로는 최적의 위치에 자리 잡고 있던 셈이다.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화도진은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1930년대에 와서는 소나무 숲이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화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마도 당시 이곳이 ‘꽃섬’이라 불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꽃섬’을 한자로 바꾸다 보니 ‘화도花島’가 되었다. 하지만 ‘화도’, 즉 ‘꽃섬’은 사실 꽃이나 섬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생긴 이름이다. 이곳은 땅 모양이 육지로부터 바다 쪽으로 삐쭉이 뻗어 나간 ‘곶串’의 형태이기에 곶섬으로 불렸고 곶섬이 와전되어 꽃섬으로, 꽃섬이 한자로 표기되며 화도로 불리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인천 소사
1995. 03. 01 인천직할시에서 인천광역시로

지금도 ‘경기도 인천시’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한때 경기도에 속했던 인천은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됐다. 당시 인천의 면적은 206.6km2. 이후 인천은 지속적인 간척 사업으로 면적을 늘리고 1980~1990년대를 전후해 현재의 검단과 계양구 북부 등을 끌어안으며 몸집을 키웠다. 1995년 3월 1일 인천은 광역시로 승격됐고, 1,000km2가 넘는, 전국 광역시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수도권 유일의 광역시이자, 서울과 부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인구가 인천의 눈부신 오늘을 대변한다. 


그때, 3월의 인천은…
1897. 03. 22 - 경인선 철도, 인천 우각리에서 기공
1898. 03. 20 - 백범 김구, 인천감옥에서 탈옥
1905. 03. 06 - 멕시코 이민 1,033명, 인천항 출발
1919. 03. 08 - 인천 전역에 독립선언서 배포
1946. 03. 10 - 인천관상대의 기상 방송 시작
1973. 03. 12 - 월미도, 중구에 편입
1979. 03. 10 - 인천 길병원 개원
2001. 03. 29 - 인천국제공항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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