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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금강산

2021-07-30 2021년 8월호

그리운 금강산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부슬부슬 초가을비가 내렸다. 2006년 10월 하순. 하객들이 결혼하는 날 비가 오면 잘 산다는 축복의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믿으려 애썼다.
주제넘게 올림포스호텔을 결혼식장으로 잡은 이유는 인천의 빛깔이 선명한 공간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맞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92) 선생은 음악처럼 하모니를 이루며 잘 살기 바란다는 요지의 주례사를 해주셨다. 주례사 말씀에 따라 살아왔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불후의 클래식 명곡 ‘그리운 금강산’은 1961년 8월 숭의동 논밭에서 탄생했으니 올해로 꼭 60주년이 되었다. 최영섭은 한상억 시인이 준 시를 받아든 그 날 저녁 작곡을 시작해 이튿날 새벽 곡을 완성했다. 당시 인천여상 음악 교사였던 최영섭은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통일을 바라는 감성으로 작곡을 했다”며 “살던 집이 논밭 한복판에 있어 피아노를 맘 놓고 쳐도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 곡은 공중파 방송을 타자마자 전국적인 선풍을 일으킨다. 방송국에 무수한 팬레터가 쇄도했는데, 대중음악이 아닌 클래식 음악에 팬레터가 도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남북 분단의 시대, ‘그리운 금강산’은 북녘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의 절절한 심정을 잘 그려내며 남북통일의 메타포(은유)를 깔고 있었던 것이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개최의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이 노래의 가사 내용 중 세 구절이 수정된다. ‘더럽힌 지 몇몇 해’는 ‘못 가본 지 몇몇 해’로, ‘우리 다 맺힌 원한’은 ‘우리 다 맺힌 슬픔’으로, ‘짓밟힌 자리’는 ‘예대로인가’로 바뀐 것이다. 최영섭이 당시 한상억에게 “머잖아 통일이 될 것 같으니 북쪽을 향한 메시지를 가다듬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데 따른 결과였다. 통일 주제가, 국민 가곡이란 별칭을 얻은 때도 이 시기다.
‘그리운 금강산’의 탄생은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이 태동한 땅이 인천이란 사실과 맞닿아 있다.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부부와 언더우드(H. G. Underwood)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닿았을 때 그들이 타고 온 배엔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가 실려 있었다. 근대 교육기관, 병원과 함께 선교를 하려면 교회를 세우고 찬송가를 가르쳐야 했다.
피아노 선율에 맞춰 노래하는, 종교적이면서 계몽적인 찬송가는 서양 클래식 음악의 모태였다. 그렇게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인천에서 시작한 클래식 음악은 서울로, 또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광복 직후인 1947년 인천관현악단이 창단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인천 음악인들의 활약은 내용과 질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을 선도하는 것이었다.
숭의동이 고향인 ‘그리운 금강산’이 환갑을 맞은 8월, 남북 간 대화가 다시 시작됐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공동어로구역 설정 등 오래전부터 남북평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해 온 인천으로서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금강산은 부른다. 남북이 손에 손을 맞잡고 ‘그리운 금강산’을 합창할 그 날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앞을 우산 쓴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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