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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잘 지내셨나요? ④ 연극배우 박정자

2021-07-30 2021년 8월호

박정자
연극은 나의 종교, 인천의 나의 고향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연극배우 박정자는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1인극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고양아람누리 극장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박정자


극장 문으로 나오는 모습이 박꽃처럼 환해 보였다. 반듯하고 활기찬 걸음걸이가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짧게 친 연갈색 쇼트 머리에 붉은 무늬 스카프. 연극배우 박정자(79)에게선 ‘스타의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는 오는 8월 말부터 디큐브아트센터 무대에 오를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연습하느라 고양 아람누리 극장을 오가는 중이라고 했다. 영국 탄광촌에서 태어나 발레의 꿈을 이뤄가는 열두 살 소년 빌리의 할머니가 그의 배역이다. 뮤지컬과는 별개로 1인 드라마 콘서트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나이로 치면 팔순. 대체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저는 언제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릅니다. 힘들고 뭐고 할 겨를이 없어요.”
박정자는 연극을, 그리고 현재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무대를 향한 치열한 열정과 삶을 대하는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 그게 젊음의 비결이라면 비결이었다. 안정적이고 멋있는, 혹은 무서운 목소리는 여전했다. 
박정자는 1942년 소래포구에서 태어나 염전과 협궤열차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다. 부친은 소래에서 천일상회라는 양조 중간 도매상을 하며 이장 일도 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던 그의 가족이 신흥동으로 이사한 때는 광복을 맞으면서다. 
“제가 네 살 때였는데, 위로 오빠와 언니 셋이 있었어요. 일본인들이 살던 적산가옥으로 이사했는데 집이 꽤 컸어요. 그런데 그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박정자의 가족은 짐 보따리를 싸 서울로 향한다. 강화도 출신 어머니는 새롭게 정착한 도시에서 직물공장을 열어 억척스럽게 다섯 자식을 먹여 살린다. 낯선 도시,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그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맞닥뜨리며 깜짝 놀란다. 연극이라는 신세계였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50년 4월, 제가 아홉 살 때였어요. 지금은 서울시의회 건물로 쓰는 곳에 극장 부민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원술랑’이라는 연극을 본 겁니다. 오빠가 신협이란 극단의 연구생이었던 덕에 극장에서 연극을 접할 수 있었던 거죠.” 오빠는 1950년대부터 1990년 초까지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박상호다. 연극을 처음 접한 경이로움도 잠시, 한국전쟁이 터지며 그의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 강화도로 피란을 떠난다.




박정자가 펴낸 책 <사람아, 그건 운명이야> 표지 사진


연극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공연 당시 대학로 ‘학전블루’ 앞에서



“서울에서 꼬박 이틀 동안을 걸어 강화도까지 갔어요. 보따리를 이고 지고 소리가 나면 엎드렸다 다시 일어나 가기를 반복했어요. 비행기가 폭격을 퍼붓는데 저는 무섭다기보다 왠지 스릴이 느껴졌어요. 돌아보니 전쟁이 한 편의 연극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피란 생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4후퇴와 함께 그의 가족은 다시금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다. “월미도에서 미군 함선인 LST를 타고 제주도로 갔어요. 갔다기보다는 무작정 사람들에 떠밀려 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군요. 영화 <국제시장> 아시죠? 그 영화 보는데 내가 저 안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3년 여의 전쟁이 마침내 정전을 선언하며 박정자는 인천으로 귀향한다. 그렇게 박문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해 6학년 초까지 고향에서 학교를 다닌다.
“제가 박문국민학교를 다닐 때는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었고 여학생들만 있었어요. 학교가 답동성당 안에 있다 보니 성당 앞마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먹을 것도, 돈도 없던 전쟁 직후 박정자는 배가 고플 때마다 자유공원에 올라갔다.
“자유공원에 쫀득쫀득한 황토가 있었는데 그걸 먹으면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배 속의 기생충을 죽인다는 얘기도 있었지요.”
학교 조회 시간엔 이따금 ‘이 박멸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학생들이 운동장에 서 있으면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며 살충제인 디디티DDT를 머리부터 온몸 구석구석에 뿌려줬어요. 살충제를 맞은 학생들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 같았지요. 참 웃픈 일이었는데 그때는 그것도 참 즐거웠어요.”
초등학생 시절 박정자는 남 앞에 서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춤을 출 때도, 연극을 할 때도 무대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남 앞에 서는 게 참 좋았고 사람들은 저를 봐줘야 했어요. 조명을 받고 박수를 받으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지요.”
다시 서울로 가 진명여중·고를 다니는 동안 박정자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끼’를 맘껏 발산한다. 웅변, 합창, 무용에 이르기까지 남 앞에 서는 일이라면 열 일 제쳐두고 종횡무진 무대를 누볐다. 그렇다면 연극영화과를 갔어야 했을 텐데, 박정자는 엉뚱하게도 이화여대 신문학과로 진학한다.
“그때는 기자가 되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2학년이 되면서 자꾸 연극에 시선이 갔고, 결국 세 편의 연극을 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에 들어섰지요.”
대학 3학년이던 1963년 박정자는 당시 개국한 동아방송 성우 시험에 응시, 15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한다. 이후 그는 반세기 넘게 14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우리나라 연극계의 산 역사로, 가장 나이가 많은 현역 배우로 연극의 역사를 써 내려오는 중이다. 그는 연극배우로는 드물게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기도 하다. 고향 얘기를 하던 그가 불쑥 애관극장 얘기를 꺼냈다.
“고향 후배로부터 애관극장이 존폐 기로에 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려서부터 다닌 극장인데… 우리 고향 분들께서 지혜를 모아 보존하는 방법을 잘 찾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정자는 “고향 인천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며 “좋은 도시는 문화가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극배우 박정자는 현재 영상작가인 남편 이지송(75) 씨와 아들 내외, 손자·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저는 언제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릅니다. 힘들고 뭐고 할 겨를이 없어요.”

“고향 후배로부터 애관극장이 존폐 기로에 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려서부터 다닌 극장인데… 우리 고향 분들께서 지혜를 모아 보존하는 방법을 잘 찾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연극 ‘해롤드 앤 모드’ 2003년



연극 ‘오이디프스’에서 예언자를 연기하고 있는 박정자



박정자는 두 발로 설 수 있는 한 무대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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