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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 특집 - 독립운동가를 도운 사람들

2021-07-30 2021년 8월호

‘백범 김구’를 도운 독립운동가들, 그

들이 머문 그 자리

인천은 청년 김창수가 백범 김구로 성장한 곳이다. 세상에 혼자서 되는 일은 없다. 백범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큰 산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옆에서 흙을 퍼 나른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며 백범이 광복 후 가장 먼저 인천을 찾은 것도 헌신적으로 자신을 도운 인천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발걸음이었다.  
강화도 사람 김주경은 김창수 구명운동을 펼쳤으며 주윤창, 주윤호 형제는 재산을 정리해 독립자금을 대주었다. 객주 박영문은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아들을 옥바라지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내주었다. <청년 김구가 만난 인천, 사람들>(저자 이희환)에 나타난 백범 김구를 도운 인물과 흔적을 찾아가 보았다.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백범 김구

대명헌은 백범 김구 구명운동을 벌인 김주경의 거처가 있던 자리로 알려졌다. 현재의 한옥은 1928년 황국현이란 부자가 지은 것이다.



대명헌은 ‘이야기가 있는 한옥 체험’을 경험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하는 곳이다. 대명헌의 실내 전경


대명헌 입구

김창수 구명운동 벌인 김주경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1896년 3월 9일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인 김창수는 그해 6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체포돼 인천감리서에 수감된다. 이때 구명운동을 적극 벌인 사람이 강화도 출신 김주경(자字는 경득)이다. 김주경은 강화의 무관으로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김창수의 부모를 번갈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법무대신 한규설을 만나 김창수의 충의를 표창해 석방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재산을 풀어 7~8차례 법부에 소장을 올렸다고 <백범일지>는 기록하고 있다. 김창수 구명운동을 벌이다 가산을 탕진한 김주경은 김창수에게 탈옥을 권고한다. 1898년 3월 19일 탈옥을 감행한 김창수는 1903년 강화도 김주경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김주경은 집을 떠난 상태였고 김주경의 집은 쇠락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김구는 김주경의 아들 윤태와 김주경의 둘째 동생 무경의 두 아이들, 인근 30여 명 아이들을 모아 <동몽선습> <사략> <천자>를 가르쳤다. 1928년 이 자리엔 황국현 고택이 들어선다. 김구는 광복 후 경교장에 몸을 푼 즉시 윤봉길, 이봉창, 김주경의 후손을 찾는 신문 광고를 냈고 1947년 강화를 찾아 황 부잣집에 머물며 옛 제자들을 만났다. 황국현 고택은 현재 ‘대명헌’(대표 최성숙)이란 이름으로 한옥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독립운동 자금 백동전 4,000냥 마련해 준

주윤창, 주윤호 형제
강화도 화도면 장곶(장화리)엔 신안 주 씨 집안이 있었다. 화도면에서 신안 주 씨 일가 땅을 밟지 않고서는 다닐 수 없을 정도의 천석꾼 집안이었다. 주 씨 집안은 1900년도 초 강화읍의 홍 씨, 온수리의 김 씨 집안과 함께 당시 강화 3대 부자로 통했다. 주윤창, 주윤호 형제가 당시 주 씨 가문을 이루고 있었다.  
<백범일지>는 주윤호 진사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백동전 4,000냥을 유완무를 통해 김창수에게 전했다고 적고 있다. 이 돈은 주윤호의 형 주윤창이 동생을 통해 전달한 것이라고 주윤창의 셋째 증손자 주영원(87) 옹은 말했다. 감옥을 탈옥한 뒤 1900년 김창수는 주윤호의 스승인 부평부 시천동 출신 유완무의 소개로 주윤호 진사를 찾아간다. 유완무는 김창수가 탈옥하도록 애쓰며 탈옥 이후 이름을 김구金龜로 지어준 인물이다. 김구는 탈옥수로 김주경의 집에 가기엔 부담이 컸던 터라 비밀리에 주 진사의 집을 찾았다. 주 진사의 집은 해변에 있었으며 11월인데도 감나무에 감이 달려 있었다. 김창수는 주 진사의 집에서 풍부한 해산물을 섭취하며 몇 날을 쉬다가 백동전 4,000냥을 받아 떠났다. 강화군 해안남로2478번길 3-4. 이곳은 주윤호 진사의 집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그의 형 주윤창의 집이다. 이 집엔 현재 주윤창의 첫째 증손자 며느리 김옥동(91) 할머니 가족이 살고 있다.   



주윤창, 주윤호 형제는 강화 3대 부자로 백범에게 독립운동 자금으로 백동전 4,000냥을 마련해 주었다. 사진은 주윤창의 집 


백범이 머물렀던 주윤창의 집

인천항 물상객주 박영문
‘월아천’은 김구 선생의 친모인 곽낙원 여사가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머물렀던 박영문 객줏집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백범일지>는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감리서 삼문(三門) 밖에 있는 개성 사람 박영문(朴永文)의 집에 들어가셔서 이제까지의 일을 잠시 이야기하시고 그 집 동자꾼으로 써달라 부탁하셨다. 그 집은 당시 항내(港內)의 유명한 물상객주라 안채에서 밥 짓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이 매우 번잡하고 많았다. 덕분에 어머님은 하루 세 끼 감옥에 밥 한 그릇씩을 갖다 주기로 하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고 적고 있다.
월아천은 1890년대 건축한 것으로 보이며 ㅁ자형 한옥 구조를 띤다. 솟을대문과 중문이 있고 본채, 사랑채, 능소화가 수려한 꽃담으로 이뤄진 가옥이다. 이 집은 앞서 인천에서 큰 포목점을 한 이순영, 애관극장 주인이던 정치국,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 씨가 소유했었다. 과거 박영문 객줏집 맞은편엔 인천항 물상객주인 안호연의 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박영문 객줏집으로 추정할 수 있는 월아천(대표 박정숙)은 현재 한식집으로 손님을 받고 있다.  



월아천은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허드렛일을 했던 객줏집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인터뷰
주윤창의 증손자 주영원 옹
“눈감기 전 증조부가

독립운동가 서훈 받는 것이 소원”


“할아버지께서 대한독립 만세 삼창을 하시면서 서럽게 목 놓아 우시는데 열두 살 아이의 눈에도 도대체 어떤 심정이면 저런 울음이 터져 나올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주윤창(1871~1945) 선생의 증손자 주영원(87) 옹은 “광복을 맞았을 때 증조부께서 우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광복 후 얼마 안 돼 돌아가셨다”고 회상했다. 증조부는 증손자 영원이 주물러주는 것을 좋아해 늘 그를 곁에 두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인품이 넉넉하고 배우기도 많이 배우신 분이었습니다. 문무를 겸비해 감찰이라는 벼슬을 해서 주 감찰이라고 불렀는데 강화도의 3대 부자였지요.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입히고 먹이고, 김구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대드린 겁니다.”
주 옹은 “<백범일지>엔 백범에게 백동전 4,000냥을 보낸 사람이 주윤창의 동생 주윤호 진사로 나오는데 이 돈은 증조부가 동생에게 전한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증조부의 독립운동이 인정 받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백범일지에 백범이 강화에 왔을 때 주 진사의 집에 머물렀다고 나와 있는데 실은 그게 바로 증조부 댁이었어요. 방이 8개인 데다 일본 놈들이 들이닥쳐도 뒷산으로 도망갈 수 있는 구조였거든. 우리 증조부님이 연장자이지만 김구 선생을 아랫목에 모시고 증조부는 바깥에서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해준 사람은 친할머니 조은하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6촌 친척인 할머니는 증조부가 믿고 의지하며 일을 맡긴 며느리이자 비서였다.
“증조부의 아들이 주시용 할아버지입니다. 신익희 선생과 동창이셨는데 상하이로 망명을 결심하고 아버지에게 망명 자금을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때 증조부께서 노발대발하며 목침을 던져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 피가 철철 났다고 합니다. 김구 선생께 4,000냥을 건넨 사실이 발각돼 고초를 겪으신 뒤 아들까지 잃을까봐 호통을 치셨던 거죠. 그때부터 아들의 사회활동을 금하고 며느리와 함께 다니셨던 거죠.” 그는 “내가 죽기 전 증조부께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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