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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에 비친 인천 ⑧ 연안부두

2021-07-30 2021년 8월호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그리운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가슴에 그리움 스미는 ‘연안부두’. 한복순 화백이 그렸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연오랑 등대 27x21(cm) 혼합 재료 2021 역무선 부둣가의 빨간 등대.

인천항을 드나드는 배들에게 길을 내어준다.

어둠 속

빛을 밝히다
육지와 바다 사이 만남과 이별, 설렘과 그리움. ‘연안부두’, 분주한 바다 정거장과 왁자한 어시장 너머 역무선 부둣가. 방파제 끝자락에 빨간 등대가 오롯이 서 있다. ‘연오랑延烏郞 등대’는 1994년 마지막 날, 처음 불을 밝혔다. 등대는 5초에 한 번 붉은 섬광을 비추며 검은 바다를 지킨다. 하얀, 노란 등대가 가까이 있어 어둠 속에서도 외롭지 않다.

꺼져가는 삶에 빛을 밝히는, 등대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한국구조연합회 인천지역대’의 민간 구조 요원들이다. 단 0.1초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대원들은 구조 요청이 오면 바로 바다로 뛰어들기 위해 부둣가에 머문다. 낡은 컨테이너 두 동을 이어붙인 초라한 공간이 영웅들의 아지트다. 구조 장비만으로도 꽉 차는 좁은 밀실, 벽면 한쪽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로부터 받은 표창장이 빼곡히 걸려 있다. 낡은 액자엔 먼지가 자욱이 쌓여가지만 자부심은 빛난다.
“격려 하나로 버티며,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자랑스러워요.”
오인성(65) 사무국장은 ‘사람 구하는 일’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았다. 오늘도 사고 10분 만에 을왕리로 가 종일 돌풍에 쓰러진 선박을 인양하는 작업을 했다. 바닷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수십 번. 아침, 점심 식사도 거르고, 해가 기울고 나서야 겨우 국수 한 그릇으로 첫 끼를 때웠다. 그 세월이 20여 년, 아내도 하나뿐인 자식마저 감당하지 못하고 그를 떠났다. 그래도 살아온 삶을 후회한 적 없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늘 아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일상처럼 넘나드는 그들이

귀한 깨달음을 준다.


바다를 마시고, 바다에서 살다, 바다로 돌아갈 바다 사나이들.

민간 구조 요원 황민선, 이춘실, 오인성 씨(왼쪽부터)


한 사람이라도 더, 숨 쉴 수 있다면
한국구조연합회 인천지역대의 회원은 40여 명. 대부분 나이 지긋한 5,60대다. 한창때 200여 명이 있었지만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대원들은 저마다의 사명감을 짊어지고 물속으로 뛰어든다. 오 국장은 수영선수였다. 월미도에서 영종도 사이를 헤엄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의협심이 남달랐다. 물이 차는 줄 모르고 갯일을 하다 갯골에 빠진 동네 어른을 구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황민선(58) 대장은 젊은 시절 중장비에 짓눌리는 사고를 당했다. 119 대원이 그를 살렸다. 바다를 호령하던 해군 특수부대 출신의 건장한 그도, 갑자기 닥친 사고 앞에선 무력했다. 2년 만에 반신불수가 될 뻔한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웠다. 다시 찾은 삶을 남을 위해 살겠노라 다짐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느 바다든 갔다. 2004년 쓰나미가 태국을 뒤덮었을 때도, 2010년 천안함이 피격돼 침몰했을 때도, 그는 생사를 다투는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베테랑 잠수부에게도 바다는 두려운 존재다. 좀처럼 그 속내를 알 수 없다. 잠잠하다가도 이내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키며 무섭게 달려든다. 서해는 더 야멸치다. 갯벌이 바로 앞 시야까지 가로막아 버린다. 물속에서 숨을 이기고 살아 나오는 것도 버거운 일이다. 바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온몸에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태국 쓰나미 구조 활동 때는 길을 잃어, 살기 위해 8시간 동안 물질을 해야 했다. 발등의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고 뼈가 그대로 드러났다. 생에 두 번째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래도 그가 구한 생명을 떠올리면, 살아온 삶이 하나도 힘들지 않다. 지난해엔 을왕리에서 물놀이를 하던 여섯 살 아이가 역파도에 떠내려가다 부표를 잡고 버틴 끝에 구조됐다. 그가 개발한 안전 부표 ‘쓰나미 키트’가 큰 역할을 했다. 그날 밤 감격에 겨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늘 아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일상처럼 넘나드는 그들이 귀한 깨달음을 준다. ‘하루하루가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숨 쉬고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민간 구조 요원들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로부터 받은 표창장


0.1초라도 구조 시간을 당기기 위해
바다 곁에 있는 영웅들의 아지트



연안 이야기 117x38(cm) 혼합 재료 2010
연안부두 남항. 멀리, 지금은 사라진 돌고래 분수가 보인다.


낚싯배 오가는 연안부두 남항


삶이 흐르는,

바다 정거장
우리에게 ‘연안부두’로 더 친숙한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육지에서 섬으로 섬에서 육지로, 수많은 사연이 스치듯 머물다 간다. 연안부두는 198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지금은 다리로 이어진 영종도와 영흥도, 무의도까지 배가 오갔다. 휴가철이면 텐트, 침낭, 코펠, 버너… 산더미 같은 짐을 짊어지고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들었다. 표를 사려고 200m, 300m씩 줄을 서는 건 예사고 텐트를 친 채 기다리기도 했다. 표를 손에 못 쥐면 서너 배, 많게는 열 배의 암표를 구해서라도 기어이 ‘집 떠나 고생’ 길에 올랐다.

오늘 터미널 안은 한산하다. 바이러스가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았다. 집으로 가는 섬 주민들이 대합실 자리를 드문드문 채우고 있을 뿐이다. 박영희(56) 씨는 언니네가 머무는 자월도에 간다. 조카들에게 줄 선물도 한아름 챙겼다. “피자가 먹고 싶어서 이모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린대요.” 한 일주일 머물며 바지락 캐고 농사일도 돕고, 조카들과 물놀이하며 지낼 생각이다. “가기 전부터 벌써 오기가 싫네요.” 마음은 벌써 섬으로 달려가고 있다.
오후 3시, 전광판 불빛이 이작 항로 여객선의 출항 시간을 알린다. 승선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승객들이 개찰구를 빠르게 빠져나간다. 항만의 하루가 끝난 듯 터미널이 텅 비었다. 하지만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들. 숱한 사연이 남긴 삶의 온기가 흐른다.

섬사람들에겐 배가 버스고 전철이다. 승객이 없다고 해서 운항 횟수를 줄일 순 없다. 오늘도 이작행 여객선은 하루 두 번 연안부두에서 닻을 올린다. ‘코리아스타’호의 이선용(62) 선장은 13년 동안 여객선을 운항했다. 열일곱 나이에 외국으로 가는 상선에 올라 20여 년 청춘을 보냈다. 항해를 시작하면 한 달은 지나야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눈뜨면 펼쳐지는 바다, 그리고 바다. 해무가 온 세상을 뒤덮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공무원 월급이 7만원이던 시절, 바득바득 참아내면 매달 40만원이라는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배를 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사이 결혼하고 아들 둘 딸 하나가 태어났다. 가족과 살 비비며 살 수 없어 힘들었다. 해 뜨면 바다로 출근해, 해가 지면 땅으로 퇴근하는 여객선으로 키를 바꿔 잡았다. “우리 가족 먹고살게 해주는, 삶의 터전이에요.” 13년 바다를 가로질렀지만, 정작 자신은 한번도 섬에 간 적이 없다. 그저 하릴없이 승객들을 태우고 내리기를 반복할 뿐.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아버지는 거친 바다 삶의 한가운데를 달린다.


우리에게 ‘연안부두’로 더 친숙한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육지에서 섬으로 섬에서 육지로, 수많은 사연이 스치듯 머물다 간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자월도 가는 배를 기다리는 박영희 씨



열일곱 나이에 배를 타기 시작한, ‘코리아스타’호의 이선용 선장


기억의 흔적 37x49(cm) 혼합 재료 2021
길바닥에서 하인천 선창가 그리고 연안부두로.
평생 생선 비린내 풍기며 살아온 어머니의 삶


엄마 몸에 밴

바다 냄새
어머니는 새벽빛이 밝아오기 전부터 집을 나섰다. 커다란 고무 대야를 이고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며 생선을 팔았다. 전철을 타고 멀리 서울까지 가기도 했다. 얼굴 한번 마주치지 못하는 날도 허다했다. 하루하루의 고단함이 밥이 되는 삶이 계속될수록 어머니의 주름은 늘어갔다. 40대에 이미 할머니처럼 보였다. 몸에는 항상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어린 딸은 그런 엄마가 창피하고 싫었다. 몸을 밀치며 “엄마 냄새나!”라고 말했다.
“얼마나 마음 다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 아파요. 그래도 지금 아흔 다 되도록 살아계시니 참 감사해요. 해드릴 수 있는 건 다 해드려야지요.”
송미영(63) 씨는 어머니 윤복순(89) 씨의 대를 이어 20년째 인천종합어시장에서 생선을 팔고 있다. 1975년 어시장이 처음 불을 밝힌 이래 어머니가 지켜온 가게다. 평생 비린내 풍기며 살아온 인생을 대물림받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처음엔 ‘몸이 아프니 일을 도와달라’는 어머니의 청을 마다할 수 없었다. 그러다 장사에 재미를 들였다. 몸은 고돼도 남편이 벌어오는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이 쥐어졌다. “세상 물정 모르던 새댁이 돈맛을 안 거지.” 말은 그리해도 어머니의 작아진 모습이, 그를 이 자리에 머물게 했으리라.

코끝에 훅 끼치는 비릿한 바다 냄새. 빽빽하게 자리 잡은 어물전에선 갓 잡아 올린 날것들이 파닥거린다. 흥정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부둣가의 짠 내를 잊지 못해 찾는 발걸음은 여전하다. 아, 연안부두….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저마다의 사연이 물기 어린 세월 속으로 젖어든다.



1975년 처음 불 밝힌 인천종합어시장


그림 한복순
화수동에서 나고 자란 인천 토박이 작가다. 자연을 직관하며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삶과 애환을 미적 대상으로 삼고 한국적 미의식을 탐색해 오고 있다. 2021 전국 달력 선정 작가, 2020 ‘공공미술 프로젝트’ 표지 작가로 선정됐다. 현재 인천미술협회 기획이사로 활동하며 사생 작가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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