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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물 소개

화방공사 조난비, 쪼개진 비석의 비밀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032-440-6768)
작성일
2024-02-07
조회수
128

화방공사 조난비, 쪼개진 비석의 비밀


명칭

화방공사 조난비

국적

대한민국

시대

1934년

재질

석재

크기

높이 220cm,  가로 25cm

소장위치

시립박물관 우현마당


 2002년 봄, 미추홀구 문학초등학교 인근 빌라 신축 공사장에서 이상한 비석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문학초등학교는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관아 자리입니다. 학교 담장 건너편 공사장에서 터파기 도중 땅속에 묻힌 비석을 발견한 것이지요. 일반적인 비석과 달리 폭이 매우 좁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양쪽 면이 불규칙적인 것이 누군가 비석을 세로로 쪼갠 흔적이 있었고, 비석의 앞뒤로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비석의 정체는 무엇이며, 누가 어떤 이유로 비석을 쪼개서 땅에 묻었던 것일까요?


문학초등학교 인근 신축빌라 공사장 땅 속에 묻혀있던 화방공사 조난비


<정면에 새겨진 열 글자, '화방공사일행조난지비(花房公使一行遭難之碑)'>

 비석 정면에 새겨진 열 글자는 그 정체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보입니다. 앞의 네 글자 '화방공사'는 1880년부터 3년 동안 일본공사를 지냈던 하나부사 요시모토(1842~1917)을 말합니다. 다음에 오는 '일행'과 '조난'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단어이고 마지막 '지비'는 앞의 여덟 글자, 즉 화방공사 일행의 조난과 관련된 비석이라는 뜻이겠지요. 화방공사 일행의 조난은 1882년 7월 임오군란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치던 상황을 말합니다. 7월 23일 밤 신식 군대와 차별 대우에 분노하여 궐기한 조선의 군병들이 서울의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자 화방공사는 20명의 공사관 직원과 함께 서울을 빠져나와 인천으로 향했습니다. 밤새 길을 달려 다음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인천 관아에 도착한 그들은 방 하나를 빌려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추격해 온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월미도까지 도망쳐 간신히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여섯 명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비석을 세운 이유>

화방공사 조난비의 원래모습


 정면의 열 글자에 비석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정보가 담겨있다면, 뒷면에 새겨진 글자는 비석을 세운 이유를 말해줍니다. 뒷면에는 모두 90자의 일본어만 남아있습니다. 쪼개져 사라진 나머지 부분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90자만으로 전체적인 맥락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미야 타로(官周太郞)를 비롯한 6명의 일본인 이름이 등장합니다. 7월 24일 인천에서 전사한 이들입니다. 그 뒤로 '인천부사 정지용(鄭志鎔)이 대원군에게 소환당해 처벌받을 것을 알고 독을 삼켜 자결하였다'라는 내용을 새겨놓았습니다. 사실 정지용에 대한 일본의 기록은 대부분 우호적이어서 피신을 요청한 일본인들에게 휴식처와 음식을 내주며 환대했다는 사실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측 기록을 보면 정지용은 일본인들을 보살펴 주었던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긴 나머지 8월 5일 일본과 화친을 반대한다는 상소를 올린 뒤 자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고종은 자결한 그에게 한성좌윤을 제수하고 장례도 성대하게 치러주었습니다. 조선 정부가 정지용을 처벌하려 했다면 정부가 나서 장례를 치르거나 벼슬을 올려주지는 않았겠지요. 이어서 비석에는 '52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내선 일체의 치세가 하늘을 우러를 때 이들 희생자의...'라는 구절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1882년으로부터 52년이 흐른 1934년 비석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인천에서 사망한 6명의 일본인 뿐 아니라 자결한 정지용마저 이 사건의 희생자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지용을 6명의 일본인과 동등한 희생자로 대우하면서 내선 일체의 사례로 활용하고자 비석을 세운 것은 아니었을까요?


<풀지못한 수수께끼>

 비석의 명문을 통해 여러 정보를 알 수 있었지만, 비석이 쪼개진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쪼개진 면이 삐뚤빼뚤 불규칙해서 일반인이 정을 대고 일일이 쪼아가며 조각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집 안의 구들이나 주춧돌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이라면 굳이 세 부분으로 쪼개지 않고 그대로 활용하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혹시 광복이 되자 누군가 일본인 이름과 일본어가 새겨진 비석을 정으로 쪼아서 조각낸 뒤, 땅속에 묻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일제에 대한 분노를 그런 식으로나마 달래기 위해서 말이죠. 이러저러한 상상 끝에 도달한 결론일 뿐, 여전히 쪼개진 비석의 수수께끼는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화방공사 조난비는 인천시립박물관 우현마당에서 관람 가능합니다.


글_배성수(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화방공사 조난비, 쪼개진 비석의 비밀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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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제목
花房公使一行遭難之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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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의처 032-440-6768
  • 최종업데이트 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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