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상설전시

[검단선사박물관] 2020년 제 5회 고고학 아카데미 '인천의 고고학' [박진영]

담당부서
검단선사박물관 (032-440-6797)
작성일
2021-08-14
조회수
1098

검단선사박물관 2020년 제 5회 고고학 아카데미 "인천의 고고학" [박진영]

  
자막)
인천의 고고학
NA)
안녕하세요 오늘 강의를 맡은 인천시립박물관 박진영 입니다. 저는 2001년부터 인천시에서 학예사로 근무하였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인천에서 조사되었던 중요 유적을 중심으로 인천의 구석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역사를 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NA)
<구석기시대>
NA)
한국의 구석기 시대를 수십만 년 전에서 약 1만 년 전으로 볼 때 이 구석기 시대는 매우 긴 시간 동안 날씨가 건조하고 추웠던 빙하기와 빙하기 사이에 기온이 높았 던 간빙기가 반복되는 기후였던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기후의 변화는 토층에서 쐐기층으로 확인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후를 반복하면서 한반도의 해수면도 낮아졌다가 상승하였으며 한반도 주변의 땅이 드러나고 주변의 육지와 연결되는 현상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과 다른 환경에서 현재 볼 수 없는 동물과 식물에 둘러싸였던 사람들이 이동하고 생활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겠습니다.
NA)
그리고 지형과 기후의 변화 동물과 식물, 사람에 의해서 과거에 형성된 일부 구석기 유적들은 변형되고 유물들도 옮겨졌을 것이고, 현재 발견되고 있는 인천의 구석기 유적들은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인데 이는 이 위치의 것들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봐야합니다.
NA)
한반도 중부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약 170여개소로 큰 강줄기를 중심으로 권역화 되어 분류 하는데요 가장 유명한 것은 한탄강 유역의 전곡리 주먹도끼 입니다. 인천의 구석기 유적과 유물은 한강 본류 하구 즉, 경기 서북부지역 김포 고양 파주 등의 유적들과 함께 비교되고 있습니다.
NA)
인천에서는 강화도, 영종도, 문학산 기슭 그리고 검단지역 등지에서 지표조사나 시 발굴조사 중에 구석기가 한두 점씩 출토되는 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구 원당동과 불로동 유적에서 뗀석기가 구석기층 내에서 발굴조사 됨으로써 인천에서도 구석기 시대에 대한 의문점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NA)
지금 검단선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인천 출토 구석기들은 주로 서구 지역에서 조사되었습니다. 석영과 규암을 거칠게 다듬어서 사용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석기의 장점으로는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돌감을 사용하여 간단히 다듬어 쓰는 것이어서 도구를 만들기도 또 버리기도 쉽다는 것입니다. 석영의 암질은 돌에 충격을 가했을 때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어지며 날카롭고 강한 가장자리를 가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또한 구석기시대에 석기를 가장 많이 만드는 재료이기도 합니다.
NA)
구석기 시대 이른 시기에는 석영과 규암 같은 돌감으로 석기를 만들다가 점차 다양한 돌감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석기는 그 형태를 관찰하고 종류를 분류합니다. 석기의 날 부분은 사람들이 보통 의도를 가지고 규칙적으로 떼어낸 흔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물방을 모양의 주먹도끼가 있지만 이외에도 찍개와 긁개, 밀개, 뚜르개 등 다양한 석기들이 있죠. 이 석기들은 후대의 명칭과 상관없이 다용도로 쓰여 졌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석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형석기에서 소형석기가 많이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NA)
검단선사박물관에서는 2016년도에 이 구석기들의 표면을 고배율의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연구를 전문가에게 의뢰하였습니다. 이러한 석기의 날 부분에는 다른 재료와 마찰되면서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석기에 사람이 활용한 증거가 확실히 남아 있던 것이죠.
NA)
인천의 구석기시대 주민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알기에 충분한 증거가 쌓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분석의 연대 측정 결과 검암동, 가정동 등 유적의 연대는 대략 기원전 4만 년에서 기원전 2만 년 전후라고 보고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당동과 불로동의 경우 뗀석기가 출토된 지형의 형성을 기원전 약 7만 년 전후로 추정한 연구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이 유적들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불로동 발굴보고서에는 그보다 한참 나중인 기원전 약 2만 5천 년 전후의 절대 연대가 보고되었으나 측정 층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NA)
<신석기 시대> 구석기시대의 빙하기가 지나고 약 1만 년 전부터 시작된 간빙기를 바로 신석기시대라고 하죠? 따뜻해진 환경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는 갈아 만든 석기와 토기를 사용하고 해안가와 강가에서 정착하여 살아갔습니다. 사냥, 어로, 채집과 함께 작물과 가축을 기르며 움집에서 살았던 흔적이 확인됩니다. 한반도 신석기 문화는 한반도 서북부, 동북부, 중서부, 남부 각 4개의 문화권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은 기원전 8천 년 전의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지만 한반도 중서부에서 신석시시대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시작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뾰족한 바닥의 빗살무늬토기는 바로 중서부의 빗살무늬 토기입니다.
NA)
인천의 신석기 시대 유적은 조개무지, 야외노지, 마을 유적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북한지역과 가까운 대연평도, 소연평도 등에서는 대동강 유역 문화의 영향을 받은 토기가 출토된 집터와 야외 노지가 확인된 바 있습니다. 이외에도 옹진군 전체의 도서지역에서는 중소규모의 패총들이 분포하지만 현재 가장 많은 유적이 확인된 곳은 영종도 입니다. 영동는 과거 삼목도, 용유도 등 3개의 섬을 간척하여 메운 곳으로 운서동, 운북동, 중산동, 삼목도, 을왕동, 남북동, 송산 등 여러 유적에서 수백여기의 야외노지와 집터가 확인되었습니다. 주민들이 식량이 풍부한 해안가와 도서지역에서 이동과 정착을 하였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또한 동양동, 경서동, 수산동, 최근 검단지역에서도 구릉 상에서 신석기시대 집터와 야외 노지가 조사되어 현재의 내륙지역에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였음이 밝혀졌습니다.
NA)
아마도 과거에는 유적의 위치가 현재의 지형보다 해안이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이전과는 달리 움집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기원전 약 4천 년 경부터 조성된 운서동 유적은 집터의 수가 66기로 확인된 곳입니다. 이곳의 집터는 원형 혹은 방형의 평면 형태로 내부에는 4주식의 기둥배치와 중앙에 얕게 구덩이를 파 불 땐 자리가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바닥보다 높은 단이 확인됩니다. 벽의 한쪽에 출입구가 설치되기도 하였습니다. 신석기시대 마을은 후기로 내려갈수록 주거지의 수가 3~5기 정도로 적어지고 야외노지의 수가 많이 확인됩니다. 먼 바다의 섬에서 확인되는 대부분의 소규모 패총들은 유물들이 소량 확인되어 일시적인 점유 장소였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NA)
이른 시기 빗살무늬토기는 구분문계라고 하여 구연부에서 바닥까지 부위별로 다른 무늬가 토기표면을 장식하는 것들입니다. 서울 암사동과 인천 운서동 등지에서 확인됩니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전체를 횡주, 혹은 종주어골문 한가지로만 장식하게 됩니다. 최종적으로는 바닥부터 토기의 표면에 문양을 시문하지 않고 기벽이 매우 두꺼워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 후기의 빗살무늬토기는 옹진군의 많은 섬에 분포하여 이곳으로 주민들이 이동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을왕동 유적에서 확인된 후기의 토기에는 빗살무늬토기의 기형에 불규칙적인 문양을 긋고 토기의 구연부에는 점을 찍어 일렬로 구멍무늬를 낸 것이 확인됩니다.
NA)
간석기를 사용한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지는 도구들은 농경과 관련된 것들 입니다. 말안장형 갈판과 봉상갈돌로 곡물가공을 하였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운서동에서는 조, 기장, 들깨 속 식물의 토기 압흔이 관찰되어 신석기시대 전기에서 말기까지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잡곡을 활용하였음이 연구되었습니다. 기원전 3,000년 전 중산동에서도 조, 기장 등을 섭취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아직은 쌀이 아닌 잡곡을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쌀농사는 청동기시대 이후에 짓게 됩니다.
NA)
이외에도 출토되는 석기는 돌괭이처럼 땅을 파는 굴지구, 석부, 화살촉 등이 있습니다. 신석기시대 석기는 전면을 갈아 사용한 것들도 있지만 자연 그대로의 거친 면을 살린 석기들도 사용합니다. 굴이 주를 이루는 패총 유적은 과거의 유물들 특히 다양한 어류, 동물의 뼈, 골각기 등을 잘 보존하여 이 시기에 다양한 해산물과 동물을 섭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꾸미개, 뼈바늘, 가락바퀴, 관옥, 환옥 등은 의생활의 증거이며 돌어망추, 찔개살 등은 물고기와 패각류를 활용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약 5천년 경부터 기원전 1,500년경 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후 무문토기를 사용하는 청동기 시대로 넘어갑니다.
NA)
<청동 <청동기 시대> 청동기시대는 이전 시기와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요?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NA)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실생활에 간석기와 민무늬토기 즉 무문토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생활 유적인 집터에서는 거의 청동유물은 찾아보기 어렵죠. 청동 재질은 무기와 의기에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것들은 주로 무덤에서 껴묻거리로 출토됩니다. 인천에는 청동기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검단선사박물관이 건립된 이유 중 하나도 원당동에서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검단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가 600여기 이상 밀집되어 있는 것이 조사되었습니다. 중서부 지역 최대의 청동기 ~ 초기철기시대 마을 유적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대규모 청동기 마을이 확인된 것은 인천 북부 가현산 인근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군과 연관 지을 수 있습니다. 고인돌은 대곡동, 불로동, 김포 마산리 등을 중심으로 가현산 기슭에 100여기 이상 다수 분포하고 있으며 인천의 남부지역인 문학산 인근에도 분포하여 학익동, 주안동, 문학동 등지에서 조사되었습니다. 강화의 부근리 고인돌은 매우 유명합니다. 청동기시대 집터와 무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 주민들이 장기간 정착하여 생활하였음을 알려줍니다.
NA)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은 고인돌 외에 돌널무덤 즉 석관묘가 있습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후기로 가면 목관 주변에 돌을 채웠던 것으로 보이는 석곽묘가 확인됩니다. 검단선사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 오시면 볼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NA)
검단지역에서도 완형의 흑도장경호가 부장된 초기철기시대 무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은 원당동, 불로동, 마전동 등 검단 지역 이외에도 계양구 동양동, 서구 경서동, 남동구 구월동, 수산동, 영종도의 운서동, 중산동, 강화도 등지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인천지역 북부와 남부, 도서지역 등 전역에서 확인됩니다.
NA)
인천 지역 청동기시대는 어땠을까요? 청동기시대 문화의 이른 시기부터 늦은 시기까지 전 시기의 변화 양상이 검단지역에서 유적으로 확인되어 참고가 됩니다. 가장 이른 시기에는 한반도 서북지역 팽이형토기의 영향을 받은 이중구연토기가 출토되는 장방형의 주거지가 조성되고 집 내부 시설로는 노지와 정형성이 떨어지는 기둥구멍 등이 확인 됩니다. 이 시기에는 1~5기 이하의 집들이 모여 있는 양상을 이룹니다. 동양동, 운서동에서도 조사되었습니다. 유물이 다수 출토된 계양구 동양동 유적 집터 내부에서는 피홈이 표시된 석검, ‘ㄱ’자형 돌칼 석촉, 석부, 석착, 숫돌, 발화석 등의 유물과 다량의 탄화된 도토리와 곡물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NA)
현재 검단선사박물관에서 유적으로부터 출토한 집을 옮겨 놓았습니다. 전기가 되면 검단지역에서 잘 보이듯이 수십여 개의 주거지가 등고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어 규모가 큰 마을을 이룬 것들이 관찰됩니다. 집터의 길이가 매우 길어진 대형 세장방형 집터 안에 내부시설로는 중앙 일렬로 배치된 여러 개의 노지 저장과 작업 구덩이 벽구, 중앙과 벽 쪽의 규칙적인 기둥구멍 내부의 단 시설 등이 확인됩니다. 공열문 즉, 구멍무늬 토기와 석부, 석검, 석창, 돌칼, 석촉, 숫돌 등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중기에는 장방형이나 방형의 주거지로 이전보다 작아집니다. 이외에도 원형의 송국리형 주거지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집터의 크기와 형태 변화는 한 가옥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과 수가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NA)
청동기시대 중기에는 주거지가 있는 구릉의 정상부에 공터나 환구라고 하여 둥근 도랑을 파 놓은 형태의 시설을 조성하였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별도의 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의례와 회합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마을에는 공방이나 창고등 특정 기능의 주거지도 세분화되어 조성됩니다. 또한 중기부터 고인돌을 축조하여 주거지역과 묘역을 구분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진전된 사회계층의 분화를 보이는 것입니다. 후기에는 원형이나 말각방형의 집터에서 공열문토기, 점토대토기, 반달돌칼 등이 출토됩니다. 주거지의 수가 이전보다 급격히 감소하는 양상을 보이고 청동기시대 마을이 해체됩니다.
NA)
인천의 청동기시대에는 농경, 사냥, 목재 가공에 관련된 간석기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갈돌, 갈판, 반달 돌칼, 공이돌, 석검, 석촉, 다양한 크기의 석부, 끌 등입니다. 유적의 성격에 따라 곡물 이용에 사용되는 도구가 또는 수렵과 채집 도구가 더 많이 출토되는 경우가 있으며 강가와 가까워도 해산물 이용과 관련된 도구가 없는 곳도 있습니다. 청동기 재질의 유물로는 청동기시대 후기 널무덤 즉 목관묘에서 세형동검으로 출토됩니다.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는 토기 형태의 종류, 석기 구성과 집터의 속성에 따라 특정 문화로 분류합니다. 앞에도 말씀드렸지만 생활유적의 이른 시기에는 이중구연토기가 관찰되다가 공열문토기의 수가 많이 확인되고 후기에는 점토대토기가 출토됩니다. 청동기시대 말 초기철기시대에는 석곽묘 혹은 목관묘에서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가 발견됩니다.
NA)
<삼국시대> 인천지역에는 마한에서 백제로 넘어가고 있었던 시기를 맞이합니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 54개국 중 하나에서 점차 한성 백제로의 영향권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인천이 마한 중 어느 소국이었는지는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인천지역에서는 이 시기에 청동기시대로부터 이어지는 고인돌군 외에 경서동, 검암동에서 확인된 초기철기시대 널무덤 즉, 목관묘가 확인되었으며 널무덤에서는 흑도장경호, 세형동검, 철기 조각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NA) `
기원전 2세기 경 기존의 고인돌을 사용한 청동기시대에 새롭게 무덤에 목관을 사용한 철기새대를 연결하는 주민들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인천 지역에서 발굴을 통해 특정한 무덤에서 출토한 세형동검은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원전 1세기경의 유적으로는 영종도 운북동 유적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유적은 시기도 매우 이르지만 동시기 다른 유적과는 이질적인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현재 중국의 산동지역과 교역을 한 한인 집단과 관련이 있는 장소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의 한나라의 화폐인 오수전과 화살촉인 철경봉축 뿐 아니라 이질적인 분형토기, 화분형토기편, 백색옹, 시루 등과 철제 도구류가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NA)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영종도 운남동 유적은 꽤 장기간의 활동이 보전된 패총유적으로 운남동 역시 운북동 유적과 마찬가지로 오수전, 철경동촉과 같이 교류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또한 운남동에서는 많은 조개의 패각 어류와 동물의 뼈 속에서 제사를 지냈던 복골과 골각기 등이 확인되었고 또 제사에 사용되었을 듯한 토기와 실생활 용기들 많은 철제 농공구도 확인되어 제사를 지냈던 중요한 장소로 추정됩니다.
NA)
기원후 2세기 초부터 형성된 김포 운양동 유적의 문화적 특징이 약간 늦은 시기 다른 인천과 김포지역 유적에서도 조사되었습니다. 인천에서는 영종도, 운서동, 중산동, 서구 연희동, 남동구 구월동, 계양구 동양동 등지에서 봉분에 주변으로 도랑이 둘러진 무덤들이 확인되었습니다. 주구묘, 분구묘, 목관묘, 널무덤이라고 하는 것들인데요. 흙으로 봉분을 먼저 쌓은 다음 관을 안치한 것을 분구묘라고 하고 둘러진 도랑 즉, 구의 유무에 중심을 둔 용어는 주구묘라고 하죠. 그리고 만약에 그러한 도랑이 없으면 목관묘라고 합니다.
NA)
가장 최근의 발견으로서는 검단 신도시 여러 지점에서 많은 수의 분구묘와 목관묘가 확인되었고 대부분은 한 사람을 묻는 형식이지만 그 중에는 한 무덤에 일곱 사람을 묻은 것도 밝혀졌습니다. 이들 무덤은 그 규모가 꽤 클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 철제 환두도 창, 도끼, 화살촉, 삽날, 낫, 손칼 같이 중요한 철제 농구, 공구류와 항아리, 구슬 등이 함께 출토되어 무덤의 주인들이 중요한 지배층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영종도, 검단, 연희동, 구월동 등 각각의 유적은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많은 수의 무덤군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무덤을 조성한 세력은 2~4세기 혹은 5세기까지 인천지역에서 지역 집단으로서 존재하며 동시기 서울 강남지역 등지에서 위치했던 한성백제의 적석총 등 그런 무덤 형식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늦은 시기에는 분구묘와 목관묘에서 한성백제양식의 토기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고됩니다. 검단선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동양동 목관묘(널무덤)은 한성백제시기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며 그 무덤에는 정형화된 짧은 목항아리와 쇠손칼이 껴묻거리로 부장됩니다. 그 후 분구묘는 점차 사라집니다.
NA)
이 시기의 사람들의 집터는 무덤의 수만큼 많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유적들에서 각각 몇 기의 집터로 발굴되었으며 집터의 일부가 파괴된 중소형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위 유적에서 확인된 집터의 평면 형태는 모서리가 죽은 방형인데 늦은 시기로 가면 방형의 집 자리의 네 귀퉁이에 기둥구멍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기둥구멍이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배열되는 지상식 건물과 많은 수의 구덩이도 유적에서 확인됩니다. 최근 남동구 남촌동에서 46기의 원삼국에서 백제시대 주거지가 밀집한 생활 유적이 조사되었는데 이것은 인천 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수의 집들이 한 자리에서 확인된 것입니다. 남천동 일대에서는 이 시기 중요한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러한 집단이 있을 가능성을 보입니다. 남천동 28호 주거지는 14m * 11m 정도의 크기로 이 대형 집터를 중심으로 많은 집들이 모여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됩니다. 중산동의 백제시대 주거지에서는 한 집터에서 30점이 넘는 철제농공구류와 곧은 입항아리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집터의 축조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는 집 내부의 시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른 시기에는 불규칙한 기둥 구멍과 무시설의 얕게 파인 불땐 자리를 사용하다가 후기에는 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구와 부뚜막 시설을 설치하게 됩니다.
NA)
불로동에서는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토기와 기와가 함께 구워졌던 가마유적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가마 출토 기와와 토기의 표면에서 확인되는 문양이 일치하여 동일한 제작자가 제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마유적에서 확인된 대옹편은 토기의 구연부가 123cm에 달하는 매우 큰 것입니다. 이 시기 인천지역에서 확인되는 유적들은 인근 서해안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무덤과 집터의 형식으로 연구됩니다. 서울 강남지역에 있었던 한성백제에서 확인되는 왕성, 왕릉, 도시와는 달리 독자적인 문화양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원삼국에서 삼국시대 유적들에서는 경질무문토기, 때린무늬토기라고 하는 타날문 토기, 회백색 무문양 토기, 그리고 철제 무기와 도구들이 출토됩니다. 토기들은 불에 끓이고 실생활에 활용되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확연히 구분되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토기제작기술의 도입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술은 한반도 서북부지역을 거쳐 유입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철제 도구들은 비약적인 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철제 무기와 농공구등은 굉장한 귀중품으로 무덤에도 많이 부장되었던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NA)
오늘의 강의는 여기까지 입니다. 짧은 시간동안 검단선사박물관의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구석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인천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 담지 못한 이야기는 차후 진행되는 강의에서 들려드릴 것입니다. 검단선사박물관을 자주 방문해주시길 바라며 이 시간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공누리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검단선사박물관
  • 문의처 032-440-6797
  • 최종업데이트 2022-10-13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