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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물 소개

조선시대 인천의 학자, 이세주묘에서 출토된 관 덮개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032-440-6742)
작성일
2021-02-02
조회수
694

조선시대 인천의 학자, 이세주묘에서 출토된 관 덮개



유물명

이세주묘출토관덮개

국적

한국

시대

조선

재질

나무

크기

52.2×181×8cm, 47.3×173.2×8.5cm

(총 2점)

문화재

지정여부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


조선 숙종 대 인천지역의 대표 학자

​이세주(李世胄)는 1626년(인조 4)에 태어나 1710년(숙종 36)에 세상을 떠난 조선시대의 학자입니다. 그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문인 부평 이씨는 미추홀구 일대에서 살아왔으며 조선시대 내내 과거급제자를 꾸준히 배출한 인천의 명문가였습니다.

 이세주는 직접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지만 학익동에 거주하면서 학문을 갈고 닦았고, 40세가 넘어서는 유생들을 가르치는 데에 힘을 쏟았습니다. 『승정원일기』에는 이세주에게 배운 유생 가운데 과거시험에 합격한 자가 3명이고 생원과 진사에 오른 자가 5명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생원'과 '진사'는 1차 과거시험인 생원과와 진사과에 합격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평생 동안 과거시험만 준비한 사람 중에서도 1차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자들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세주는 매우 훌륭한 학자이자 교육자였습니다. 이러한 학문 활동과 교육 활동에서의 성과를 인정 받아 이세주는 숙종 대에 동지중추부사(종2품)라는 높은 관직을 수여받았습니다.


학익동의 옛 지명, 제운리(霽雲里)와 이세주

 이세주의 호(號)는 '제운(霽雲)'입니다. 호는 사람을 편하게 부르기 위해 지은 호칭을 말합니다. 옛 사람들이 호를 지은 이유는 상대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호를 짓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지만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인 이이(李珥)가 자신의 동네 이름을 따서 '율곡(栗谷)'이라는 호를 지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세주의 호 역시 자신이 나고 자란 동네이자 학익동의 옛 이름인 '제운리'에서 따온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제운리'라는 이름이 이세주의 호인 '제운'에서 유래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제운리는 '제운 이세주가 살던 동네'라는 뜻이 됩니다. 이세주는 약 300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제운'이라는 지명은 '제운사거리'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세주의 묘와 관 덮개의 특징

 이세주의 묘는 원래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동막 해변 일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연수구 일대에 대규모의 주거단지가 들어서면서 그의 묘는 경기도 평택시로 옮겨졌습니다. 묘를 옮길 당시에는 관을 덮고 있던 명정(銘旌)이 관 덮개에 그대로 붙어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명정'이란 죽은 사람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관직과 이름 등을 기록(銘)하여 관 위에 씌워 함께 묻는 깃발(旌)을 말합니다. 관 덮개는 붉은 색으로 칠을 하였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끝 부분이 일부 훼손되었습니다. 이세주의 묘에서 출토된 관 덮개는 문화재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4년 11월 4일에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글_김재섭(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조선시대 인천의 학자, 이세주묘에서 출토된 관 덮개_1

조선시대 인천의 학자, 이세주묘에서 출토된 관 덮개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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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제목
李世胄墓出土棺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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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의처 032-440-6768
  • 최종업데이트 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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