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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물 소개

국산 화약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국화약 공업용 6호뇌관 및 상자'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032-440-6742)
작성일
2021-10-26
조회수
790

국산 화약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국화약 공업용 6호뇌관 및 상자'



명칭

한국화약 공업용 6호뇌관 및 상자

국적

한국

시대

광복 이후

재질

 뇌관 : 금속


 상자 : 지류

크기

 뇌관 : 길이 4cm×지름 0.7cm


 상자 : 세로 6.5cm×전체높이 3.9cm


​우리나라 화약의 역사

흔히 '화약'이라고 하면 가장먼저 다이너마이트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가 개발되기 전까지 인류는 ‘흑색화약’이라는 혼합화약을 사용했습니다. 흑색화약은 유황·목탄·초석을 혼합하여 만든 화약으로 중국에서는 불꽃놀이 폭죽으로 쓰였고, 총이나 포와 같은 무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흑색화약이 들어온 시기는 고려 말입니다. 1377년에는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이 설치되면서 화약이 본격적으로 생산되었습니다. 화약 제조는 이후 조선에서도 이루어졌지만 화약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성분인 초석(천연질산칼륨)의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난항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흑색화약과 다이너마이트가 산업분야에 쓰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은 우리나라 내에서의 화약류 제조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필요한 화약은 일본에서 수입하였습니다. 그러나 1931년에 발생한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전쟁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자 화약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갔습니다. 이에 일본은 조선화약제조주식회사, 조선천야카리트주식회사, 조선유지주식회사 등을 설립하고 우리나라 각지에 공장을 세워 화약을 생산하였습니다. 인천에서 화약이 생산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조선유지주식회사는 인천화약공장을 세우고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냈습니다.


국산 화약의 발상지, 한국화약주식회사 인천공장

 광복 이후 조선유지주식회사의 인천화약공장은 남한지역에 있던 유일한 화약공장이었지만 6.25전쟁을 겪으면서 폐허로 변했습니다. ㈜한화의 전신인 한국화약주식회사는 1955년에 인천화약공장을 인수한 이후 화약을 국산화하기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1957년에 한국화약주식회사 인천공장에서 국산 다이너마이트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화약의 국산화를 이루어 낸 기념비적인 성과로 정부는 수입에 의존하던 일반산업용 화약의 수입을 중단하고 이를 한국화약주식회사 인천공장에서 생산하는 화약으로 대체하도록 하였습니다. 한국화약주식회사 인천공장은 국산 화약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화약주식회사 인천공장의 대표 생산품 : 한국화약 공업용 6호 뇌관 및 상자

 ‘한국화약 공업용 6호뇌관 및 상자’는 공업용 뇌관 4점과 케이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뇌관은 화약에 불을 붙이는 데 쓰이는 금속관을 말합니다. 공업용 뇌관은 뇌관에 들어가는 화약의 양에 따라 3호, 6호, 8호로 구분되며 가장 많은 양이 들어가는 8호뇌관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참고로 조선유지주식회사의 인천화약공장에서도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함께 생산하였습니다. 케이스의 윗면에는 “6호뇌관 공업용 100관, K.E.C., 한국화약주식회사 인천공장(六號雷管 工業用 100管, K.E.C., 韓國火藥株式會社 仁川工場)” 이라는 글자가 기재되어 있어 이 뇌관이 한국화약주식회사 인천공장에서 생산되었음을 알려줍니다. ‘한국화약 공업용 6호뇌관 및 상자’는 화약이 국산화되는 과정은 물론 국산 화약의 발상지로서 2006년을 끝으로 운영이 중단된 한국화약주식회사 인천공장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글_이한나(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국산 화약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국화약 공업용 6호뇌관 및 상자'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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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제목
韓國火藥 工業用 六號雷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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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의처 032-440-6768
  • 최종업데이트 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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