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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물 소개

1940년대 초반 인천 화교에 대한 기초 사료, 인천화교 소맥분 배급대장 및 세대별 명부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032-440-6764)
작성일
2022-06-28
조회수
558

1940년대 초반 인천 화교에 대한 기초 사료, 인천화교 소맥분 배급대장 및 세대별 명부


명칭 인천화교 소맥분 배급대장 및 세대별 명부
국적 한국
시대 일제강점기
제작연도 1942년
재질 종이
크기 가로 20~20.4cm, 세로 27.2~28.3cm
소장위치 수장고

한국에 정착한 근대 화교의 역사는 1882년 임오군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해 8월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으로 청 상인들의 내륙 무역이 가능해졌으며, 1884년에는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통해 지금의 선린동(善隣洞)에 청국조계(淸國租界)가 형성되었습니다. 인천은 근대 조선의 화교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공간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으며, 화교는 근대의 인천을 이해하는데 빼놓아서는 안 될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번에 소개할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세 점의 화교 자료는 1940년대 초반 인천 화교사회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유물입니다.



인천화교 소맥분 배급대장의 내용과 의의

인천화교 소맥분 배급대장은 1942년 4월 12일 인천화상상회(仁川華商商會, 인천화교협회의 전신)에서 중화민국 주인천영사분관(中華民國駐仁川領事分館)에 보낸 공식 문서로, 인천의 화교들에게 밀가루를 배급한 내용을 정리한 장부입니다.

표지의 오른쪽에는 대장의 제목인 “화교영취소맥분상세표(華僑領取小麥粉詳細表)”와 작성 연월인 “민국31년(民國三十一年)”, “소화17년(昭和十七年)”, “4월(四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국이라는 중국 연호와 소화라는 일본 연호가 함께 적혀 있어 이채롭게 느껴집니다. 표지의 왼쪽에는 수신처인 “중화민국주인천영사분관전(中華民國駐仁川領事分館殿)”이 적혀 있으며 그 아래로 인천화상상회의 고무인이 찍혀 있습니다.

인천화상상회는 6개의 위탁업체를 통해 600포의 밀가루를 인천 거주 화교 301세대 1,536명에게 배급하였습니다. 위탁 배급업체로는 덕영상점(德永商店), 일하부(日下部), 삼공상점(三共商店), 태창상(泰昌祥), 광성상점(廣成商店), 농본상점(瀧本商店) 6개소이며, 주요 배급지역은 미생정(彌生町), 신정(新町), 화방정(花房町), 경정(京町), 금곡정(金谷町), 서경정(西京町), 중정(仲町) 등입니다.

화교들의 주식인 소맥분에 대한 배급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문서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1937년부터 시작된 중일전쟁과 뒤이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천의 화교 사회에서도 엄격한 경제 통제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인천화상상회가 사전 조사를 통해 세대별 수요량을 정하는 강력한 배급 방식을 띠고 있었으며, 상업에 종사하는 상점 위주로 배급량을 기록한 특징이 있습니다. 이 자료는 1942년 인천 화교의 세대수, 세대별 직업 분포, 지역별 인구분포, 인천에서의 밀가루 보급 및 판매의 통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다음에 설명할 인천화교 세대별 명부와의 비교 대조를 통해 구체적인 화교 사회의 복원이 가능할 것입니다.


인천화교 세대별 명부의 내용과 의의

인천화교 세대별 명부(仁川華僑 世帶別 名簿)는 1942년 8월 이후 인천에 거주하고 있던 화교 263세대 1,365명에 대한 세대별 명부입니다. 인천부 관할 지역별(町別)로 구분하여 각 세대별 세대번호, 직업, 상호명, 이름, 성별, 생년월일, 본적지, 현주소를 기재하였습니다. 일반적인 호구문서와는 달리 화상들의 상점을 중심으로 종업원의 인적사항을 기재하였고, 그 가족들은 별도의 세대로 구성하였습니다. 인천화교 소맥분 배급대장과 마찬가지로 인천화상상회에서 작성한 문서로 추정되며, 화교사회의 상업 분포와 전반적인 인구 구성원 등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화교의 총 세대는 263세대, 총 인원은 1,365명입니다. 본적지별로는 산동성 출신의 화교가 전체의 93%를 차지하며 산동성 내 23개현, 특히 인천에서 가까운 동부지역 출신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밖에 산동성 외 중국의 12개성에서 유입되었으며, 인천 본적자 1명과 일본 본적자 2명이 확인됩니다. 화교의 거주지 분포는 미생정의 인구가 가장 많았으며, 번화가인 미생정과 그 주변 지역에 잡화상, 포목상, 양복점, 무역상 등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호떡집과 음식점은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었으며 화방정의 경우 거주세대는 많으나 상점이 적어 주거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직업별로 보면 취업을 목적으로 한 노동인구인 10대 후반~40대 전반의 인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무직인 아이와 여성 등 가족단위로 구성된 세대가 많아 정주성이 강한 인천화교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일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40년대 초반은 화교사 연구뿐만 아니라 인천의 지역사 연구에서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시기입니다. 전시체제 아래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는 자료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1942년 간행된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두 점의 화교 자료는 1940년대 초 인천 화교의 특징을 파악하는 기초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글_김민희(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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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華僑 小麥紛 配給臺帳 및 世代別 名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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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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