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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물 소개

월미도교량통행인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032-440-6768)
작성일
2023-09-27
조회수
373

월미도 교량 통행인


명칭

월미도교량통행인

국적

한국

시대

1906 ~ 1911

재질

나무

크기

가로 6.1cm , 세로 4.4cm , 두께 1 cm

소장위치

수장고


< 인천의 월미도 >

 월미도는 1655년 효종 때 기록인 ‘비변사등록 備邊司謄錄’에서 확인됩니다. 당시에는 어을미도(魚乙未島)라고 불리다가 숙종 때부터 월미도(月尾島)로 쓰여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조선 중기 월미도에 행궁을 설치하여 피란로를 만들고자 했는데 이는 당시에도 월미도가 군사 요충지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월미도는 개항 이전과 이후에 청과 일본, 러시아의 힘겨루기 각축장이 됩니다. 군사적 목적의 석탄창고를 만들기 위함이었는데 결국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월미도는 일본의 군사기지가 됩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의 승리 이후 1910년 병합에 이르는 동안 월미도는 제국 열강의 각축장이면서 한반도 운명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조선을 완전히 장악한 일본은 월미도를 유원지로 만들 계획을 세웁니다. 1923년 설립된 월미도유원회사는 월미도에 조탕과 해수욕장, 용궁각, 호텔 등을 건설하여 유흥지로 개발합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월미도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유흥 명소가 됩니다. 


< 군용 철교 >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일단락이 됩니다. 조선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은 월미도의 민가를 철수시키는 한편 러시아 석탄창고도 폐쇄하여 월미도를 완전한 일본의 군사기지로 만듭니다. 일본은 1906년 2월 월미도에 군용 다리를 신설하고 철로를 놓아 1911년 경까지 사용하는데 이는 군사기지로 월미도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월미도 군용철교는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빼앗고 군사기지화한 증거입니다.


< 월미도교량통행인감(月尾島橋梁通行印鑑) >

 가로 세로 5cm 내외의 나무에 음각으로 명칭을 새기고 끈을 넣는 용도의 구멍이 뚫려 있는 이 유물은 일본이 교량철교를 설치했던 1906년에서 1911년 사이에 사용된 인감입니다. 도장 앞면에는 임시군용철도임부인(臨時軍用鐵道監部印)이 음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교량 통행 허가권이 임시군용철도감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장의 뒷면에는 다른 인감과 식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印 第三七二號 月尾島 橋梁 通行印鑑’이 묵서되어 있습니다.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조선의 월미도에서 일본의 통행 허가를 받아야 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글_허윤현(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월미도교량통행인_1

월미도교량통행인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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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제목
月尾島橋梁通行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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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 문의처 032-440-6768
  • 최종업데이트 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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