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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물 소개

역사속으로 사라진 대한성냥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032-440-6768)
작성일
2024-04-26
조회수
42
역사속으로 사라진 '대한성냥'

명칭

대한성냥

국적

대한민국

시대

광복 이후

재질

종이

크기

가로 10.8, 세로 8.7, 높이 4.1 (cm)

소장위치

시립박물관 역사2실 현대실(2-3층 복도)


< 우리나라에 전해진 성냥 >

 불과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부엌에서 사랑방까지 집안 곳곳에 두고 사용했던 가정의 필수품 성냥은 이제는 생일이나 기념일 케잌에 촛불을 켤때나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개항과 함께 근대 문물의 하나로 성냥은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부싯돌을 이용해 어렵게 불을 켜야 했던 시절 성냥은 장소에 구애를 받지않고 간편하고 휴대하기 편리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손쉽고 빠르게 불을 피울 수 있는 성냥은 부싯돌의 역할을 점차 대신해 갔습니다. 처음 조선에 외국인들에 의해 성냥공장이 세워졌으나 값싼 일본산 성냥에 밀려 금방 문을 닫았습니다. 1917년 일본인에 의해 인천 금곡리에 ‘조선인촌주식회사’라는 성냥공장이 세워졌고 ‘조선인촌‘을 중심으로 인천은 우리나라 성냥 생산의 70%이상을 차지하는 성냥산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 대한민국 대표!! 대한성냥 >

대한성냥공장 전경 (한국산업사진부흥연감)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성냥제조회사로 연간 2,000만톤을 생산할 수 있는 생산설비를 보유했던 조선인촌은 광복과 함께 미군정청 귀속 이후 적산기업으로 불하되었으나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아 조선성냥은 점점 와해되었습니다. 그 즈음 화수동 287번지 현재의 화수시장 위치에 석모도 출신 이승묵이라는 사람이 ‘조선성냥’의 생산설비를 사들여 1948년 ‘대한성냥공업주식회사’를 열었습니다. 성냥의 주원료인 염소산칼륨의 수입 통로 였던 인천은 다른 지역보다 원료 획득이 유리했습니다. 이승목은 많은 양의 염소산칼륨을 공장 부지에 저장해두었고 6·25전쟁에도 공장건물은 폭격을 피해 성냥산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천은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성냥 제조 인력이 충분한 곳이었습니다. 공장 주변은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고 한 집 건너 한 집이 성냥갑을 접고 라벨을 붙이는 부업에 뛰어 들어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대한성냥 공장은 1950년대 2천평의 부지, 550평의 공장에서 250명의 직원이 매일 80만 갑의 성냥을 생산하며 인천은 또 다시 성냥 제조업의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 ‘대한성냥’은 박물관으로... >

일제강점기 조선성냥
광복이후 초기 대한성냥

 일정한 양의 성냥을 담을 수 있는 포장 용기로서 성냥갑은 간편한 휴대와 손쉬운 보관을 가능하게 했고, 포장 겉면에 인화성 물질을 도포하여 성냥 마찰시에 점화력을 촉진하는 도구적 기능까지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성냥갑 표면에 부착된 다양한 그래픽 이미지의 라벨은 성냥을 단순한 발화도구가 아닌 다양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도구였습니다. 1948년부터 1968년까지 우리나라 성냥산업을 이끌었던 인천의 ‘대한성냥’은 ’대한‘이라는 이름과 ’무궁화‘가 성냥갑의 대표 도안으로 마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었습니다. 초기 ’대한성냥‘의 라벨 이미지는 일제강점기 ’조선성냥‘에서 그대로 차용한 것입니다. 인천에 있었던 ’조선인촌(조선성냥)’의 ’조선표‘ 라벨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조선성냥의 상징성을 ’대한성냥‘이 적극 활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성냥과 대한성냥 라벨을 비교하면 ’SAFETY MATCHES’는 그대로 모방되었고 동그란 지구본 그림 이미지 안에 ‘조선(朝鮮)’ 대신 ‘대한’을, 중앙에 ‘나뭇잎’은 ‘무궁화’로 대체되었으나 거의 유사한 디자인입니다. ‘안전 성냥’이라는 문구는 과거 유럽에서 제품에 대한 신뢰를 전달하고자 라벨이미지에 품질보증서처럼 홍보 문구로 삽입했는데 일본에서 이를 기호처럼 인식하여 성냥 이미지로 활용했습니다. 특히 성냥의 안전성 홍보가 효과적인 디자인 요소가 된 것입니다. 대한성냥은 ‘조선성냥’의 이미지를 차츰 벗어나 대한성냥으로 명성을 얻으며 195,60년대 독자적인 다양한 라벨 디자인과 형태로 성냥갑을 만들었습니다. 


1950~60년대 다양한 디자인과 형태의 ‘대한성냥’ 


 화려했던 ‘대한성냥’은 1968년 화재로 전소되며 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1회용 가스라이터, 휴대용 버너, 가정용 가스레인지 등 보다 편리한 발화도구의 등장은 성냥의 시대를 저물게 했습니다. 이제 ‘대한성냥’은 보기 드문 유물이 되어 박물관에서나 그때 그 시절 성냥을 추억할 수 있습니다. 


대한성냥 성냥갑은 인천시립박물관 역사 2실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의 광복이후 코너에서 상설전시 중입니다. 


글_김성이(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첨부1. 대한성냥


역사속으로 사라진 대한성냥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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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제목
大韓성냥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 문의처 032-440-6768
  • 최종업데이트 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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