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기계식 소주를 제작한 '조일양조주식회사'
| 명칭 | 조일양조장 백자술통 / 금강소주 광고지와 절후표 |
국적 | 한국 |
시대 | 일제강점기 |
재질 | 도자기 / 종이 |
크기 | 바닥지름 26, 입지름 3.5, 높이 38.5 / 가로 26.4 세로 19.7(cm) |
소장위치 | 인천도시역사관 상설전시실 / 시립박물관 역사2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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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의 탄생>
전통사회에서 술은 집집마다 필요할 때 빚는 가양주(家釀酒) 형태로 전승되어왔습니다. 전통적으로 술은 농사일이나 제사 등 일상적인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세수를 늘리기 위해 주세법(1909)을 제정하여 면허가 있는 사람들만 술을 만들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후 주세령(1916)을 공표하면서 집에서 빚는 술에 대한 과세를 양조장의 술보다 높게 매기는 면허제를 시행하게 되었고, 1934년 자가용 술의 제조 면허제를 폐지하면서 가양주는 밀주(密酒)로 단속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양조장에서 주조한 술만이 합법적인 술로 인정되었고, 양조장은 이렇게 합법적인 술을 만들기 위해 탄생한 공간이었습니다.
개항이후 양조업은 인천의 3대 산업(정미업, 양조업, 제염업)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1920년대 초반 인천의 인구는 3만7000명 정도였는데 한국인 양조장 14개소, 일본인 양조장 7개소 등 21개소의 많은 양조장이 있었습니다.
<한국 ‘최초 기계식 소주’를 만든 조일양조주식회사>
조일양조주식회사는 1919년 10월 12일 인천 선화동(당시 桃山町)에 설립되었습니다. 자본금 100만원에 일본인 정본등차랑(釘本藤次郞) 등이 세운 이 회사는"청주의 양조 및 판매, 소주 및 주정 제조 판매, 혼성주 및 과실주 제조 판매, 양조를 하는 집에 대한 금융 신탁업, 주류의 위탁판매, 전 항에 따르는 부대사업"등을 하였습니다. 조일양조에서 생산한 소주는 ‘금강(金剛)’, 청주는 ‘금강학(金剛鶴)’이라는 상표로 판매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기계를 증설해 대량생산을 하였고, 저렴한 가격과 맛을 내세워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쳤습니다. 1939년 이후에는 만주·사할린까지 진출할 만큼 인기를 끌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실업축구팀도 창단했습니다. 조일양조는 해방 후 적산 공장으로 계속 운영되다가, 미군정이 양조 금지령을 내려 한동안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양조장 건물은 소주 생산이 중단된 뒤 여러 용도로 쓰이다 2012년에 철거되었고, 현재 주차장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조일양조주식회사 관련 유물>
인천시립박물관에는 백자술통, 금강소주 전단지 등 조일양조장관련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백자술통은 조일양조주식회사(朝日釀造株式會社)에서 주조한 청주 “金剛鶴(금강학)”을 담았던 술통입니다. 몸통은 원통형으로 윗면에는 입과 함께 두 귀가 있으며, 새끼줄을 꼬아 놓은 듯한 띠가 둘러져 있습니다. 하단에 지름 2.5cm 가량의 술빠짐용 구멍을 내어 목재뚜껑으로 막아놓았습니다. 몸통 앞면에는 ‘金剛鶴(금강학)’ 글씨와 함께 금강산과 학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후면에는 ‘仁川朝日釀造株式會社(인천조일양조주식회사)’라고 적어 상표명과 양조장의 이름 등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 유물은 인천도시역사관 상설전시실에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또다른 조일양조장 유물로 금강소주 전단지가 있습니다. 조일양조주식회사(朝日釀造株式會社)에서 주조한 금강소주(金剛燒酒)를 판매하기 위하여 인천본정(仁川本町) 하야상점(河野商店)의 광고지입니다. 조일양조주식회사 주조장(酒造場)과 소주공장(燒酒工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배경으로 중앙에는 우리나라 24절기의 명칭과 날짜를 소화(昭和) 4년(1929) 기사년(己巳年) 기준으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이 유물은 인천시립박물관 역사2실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글_최연주(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첨부1. 조일양조 백자술통
첨부2. 금강소주 광고지와 절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