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요 유물 소개

불로장생의 기원을 담아-이상범의 ‘신선이 사는 봉래산 그림'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032-440-6768)
작성일
2025-03-14
조회수
253

불로장생의 기원을 담아-이상범의 '신선이 사는 봉래산 그림'




명칭

청천 이상범 봉래선산도

국적

한국

시대

1928년

재질

직물

크기

가로 85cm,  세로 31cm

소장위치

인천시립박물관 수장고



 고운 천 위에 넓고 깊은 산이 첩첩이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편으로는 끊없이 펼쳐질 것 같은 바다가 여백으로 남겨져 있고 산골짜기에는 안개가 자욱합니다. 산등성이에는 소나무와 분홍색·흰색 꽃이 만개한 나무 몇 그루가 위치해 있고, 나무 사이로는 화려한 전각이 보입니다. 굽이치는 산을 넘어가다 보면 막 떠오르는 붉은 해와 산을 향하는 두 마리의 학도 보입니다. 연녹빛으로 채색된 산과 꽃의 색이 어우려졌을 원래의 그림은 따뜻하면서도 적막한 봄날의 느낌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그림의 구성>


 그림의 오른쪽 위에는 “봉래선산 무진 원춘 위축 근원 인형 왕대부인 육십일수 청전 이상범(蓬萊僊山 戊辰 元春 爲祝 槿園 仁兄 王大夫人 六十一壽 靑田 李象範)’이라는 글이 적혀 있어 이 그림을 누가, 언제, 왜 그렸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 근현대 동양화단의 대가였던 청전 이상범(1897~1972)이 무진년(1928년)에 근원이라는 인물의 모친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그렸는데, 환갑을 축하하기 위한 그림에 걸맞게 불로장생의 약이 있다고 믿어지는 봉래산을 소재로 하였습니다. 봉래산은 기원전 4세기 전 중국의 도가사상가 『열자』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봉래산은 발해 동쪽 아주 먼 바다에 있는 다섯 개 산 중의 하나로, 그곳에서 자라나는 꽃과 열매를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신선인 곳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봉래산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후기부터인데 드물게 그려지다가 근대기에 이르러 자주 그려졌습니다.

 이상범의 봉래산 그림은 동시기 다른 서화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점이 보입니다. 스승인 안중식이 그린 봉래산은 세로로 긴 형태의 화면에 그려져 아래로부터 위로 굽이쳐올라가는 모습이라면, 이상범은 가로로 긴 장방형의 화면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봉래산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안중식과 오일영이 전통적인 산수화의 구도로 봉래산을 그려냈다면, 이상범은 근대화된 동양화의 구도로 봉래산을 그려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서화가들은 봉래산 그림을 구성할 때 개인의 개성에 따라 소재를 조합했는데, 이상범은 해와 학, 꽃나무를 그려넣고, 사람은 전혀 그리지 않은 조합으로 구성했습니다. 아마도 꽃나무는 장수를 의미하는 복숭아 나무일 것입니다.


<그림의 주문자와 환갑 잔치의 성행>

 아쉽게도 화제에 등장하는 ‘근원’이 누구인지, 이상범과 교유가 있었던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근대 화단에서는 환갑을 축하하는 그림이 자주 그려졌습니다. 이런 그림들은 서화가들이 스스로 지인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그리기도 했지만, 지인의 부탁을 받거나 때로는 서화관을 통해 주문을 받아 그렸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근대에는 유명 인물의 환갑 잔치 기사가 신문에 실릴 정도로 환갑을 축하하는 문화가 유행했습니다.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서 서화가들이 잔치에서 그림을 즉석으로 그리기도 했고, 선물로 미리 그림을 주문해 두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환갑을 축하하는 그림들은 산수, 소나무, 학, 사슴, 수성노인, 기명절지, 사군자, 화훼 등 여러 소재로 그려졌는데 대부분 장수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림 한 켠에는 환갑 맞이 축하 글과 장수를 기원하는 글을 적었습니다. 지인의 장수를 축하하고 더 오래 살 것을 기원하는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니 돈으로 많은 것을 해결하는 요즘의 문화에 비하면 매우 정성스럽게 느껴집니다.


<서화가 청전 이상범>

 ‘봉래선산도’를 그린 청전 이상범은 1897년 충청남도 공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지 6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온 가족이 서울로 상경했다고 합니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교육열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무료로 그림을 배울 수 있다는 소식에 서화미술원에 입학해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서화미술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교육 기관으로 당시 대가였던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이상범은 1914년 17세의 나이로 입학해서 1918년에 졸업했는데, 스승 안중식의 총애로 그의 호 ‘심전(心田)’에서 ‘전(田)’자를 이어받아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상범은 1922년 일제의 문화통치 수단의 하나로써 개최되기 시작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여러번 수상하면서, 식민지 화단에서 굳건한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1927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신문 삽화를 담당하게 되는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건을 공모하면서 동아일보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일제의 전쟁 총동원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등 일제강점기 역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낸 화가이기도 합니다. 해방 이후에 홍익대학교 미술 교수로 재직하고, 퇴직 후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여 한국적인 정서를 드러낸다고 평가받는 ‘청전양식’의 산수화를 완성해냈습니다.


 이 그림은 인주문화재단에서 2021년에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이상범의 독창적인 양식 형성 과정과 근대 동양화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당시 환갑 축하 문화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그림입니다. 비록 그림은 이런저런 이유로 박물관에 있지만 근원의 모친께서는 신선과 같이 오래 사시며 다복한 여생을 보내셨기를 바랍니다.



<참고문헌>

박아름, 「근대 한국화단의 祝壽畵 연구」, 『미술사연구』30, 미술사연구회, 2016.

이중희, 「근대산수화 3대가의 작품세계 비교론」, 『한국근대미술사학』15,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05.

원갑희, 「청전 이상범론」, 『원광미술』2,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1975.

국립중앙박물관, 『근대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 2019.


글_윤현진(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첨부.  청천 이상범 봉래선산도


공공누리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한자제목
靑田 李象範 蓬萊僊山圖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 문의처 032-440-6768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