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제일을 꿈꿨던 대한천일은행
| 명칭 | 대한천일은행 청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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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한국 |
시대 | 2006년 |
재질 | 지류 |
크기 | 가로 37.2cm, 세로 30cm |
소장위치 | 인천시립박물관 역사2실 |
<근대 경제주권의 상징이자 민족은행으로 우뚝 서다>
근대적 금융기관인 은행의 등장은 강화도조약 이후인 18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본은 제1은행을 필두로 제18은행, 제58은행 등을 설립하며, 자국 상인의 활동을 지원하고 조선 내 금융 자본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영국의 홍콩상하이은행, 러시아의 한러은행 등 외국계 은행들이 속속 등장하며 조선의 금융 주권은 점차 외세에 잠식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외국 은행들의 침투 속에서 조선은 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때 설립된 은행이 바로 대한천일은행입니다.
대한천일은행은 대한제국 황실과 조선 상인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민족은행입니다. 1899년 1월 22일 탁지부에 은행 설립을 청원하고, 2월 1일 정식 인가를 받아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상인, 황실, 고위 관료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 조세 취급권을 획득하며 막대한 이익을 올렸고, 중국과 일본 상인들의 외환 거래를 통해 국제적 은행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02년에는 고종의 셋째 아들인 영친왕을 사장으로,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이용익을 부사장으로 임명하면서 은행의 위세는 더욱 커졌고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은행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그러나 을사늑약 체결 이후 통감부의 화폐정리사업과 경제 불황으로 대한천일은행의 실권은 점차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결국 1911년에는 ‘대한’이라는 명칭이 빠지고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99년에는 한일은행과의 합병으로 한빛은행이 되었고 2002년부터는 우리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민족 금융의 꿈, 인천에도 >
청원서
은행을 설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화폐의 유통을 위하여 상업이 번성하기를 위함이오니,
마땅히 인천항, 부산항, 목포항에 지점을 설치하는 것이 적절하므로
이에 청원드리오니 검토하여 허가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광무3년(1899년) 3월 17일
대한천일은행 임원 최문식 박경환 김기영 김두승
탁지부대신 각하
이 유물은 대한천일은행이 당시 개항장이자 상품 유통의 중심지였던 인천, 부산, 목포에 지점을 설치하고자 탁지부에 요청하는 문서로, 은행의 전국 확장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지점 개설이 허가된 지역은 인천과 개성이었는데 개성은 황실의 인삼 매매 자금이 오갔던 곳이고 인천은 서울 수도와 인접한 국제무역항으로 외국상인과의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진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1899년 5월 15일, 중앙동 3가 5번지에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이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초대 지점장으로 인천 객주 출신이자 인천항신상협회를 조직하고 인천감리를 역임한 서상집이 임명될 만큼 인천 지역 상권에 큰 영향력을 가졌으며, 금융기관 중에는 최초로 지점 업무 규정집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점의 부침과 더불어 1905년 이후 점차 영업이 어려워졌고 1911년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1920년에는 항동 5가 13번지(현 인천문화재단)에 붉은 벽돌 2층 건물을 지어 이전하면서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의 흔적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루지 못한 꿈은 기록과 기억으로>
다행히 대한천일은행과 관련된 문서는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에 19건 75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 근대 금융의 태동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서 국가지정기록물로 등재되었습니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이 중 대한천일은행 공첩존안(公牒存案), 지점규칙 등 6건 7점을 복제하고, 대한천일은행 청원서 2점을 역사2실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하늘 아래 제일가는 은행’이 되기를 염원했던 대한천일은행은 비록 역사의 한 자락으로 사라졌지만, 자주적 금융의 기틀을 마련하고 근대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글_김래영(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첨부. 대한천일은행 청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