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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물 소개

미국 신문이 그린 신미양요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032-440-6768)
작성일
2025-06-13
조회수
84

미국 신문이 그린 신미양요


명칭

하퍼스 위클리 '신미양요' 기사

국적

미국

시대

1871년 9월 9일

재질

지류

크기

가로 28.5, 세로 40.7cm

소장위치

인천시립박물관 수장고



 <신미양요> 

 신미양요는 1871년 미국이 조선에 통상 수교를 강요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면서 발생한 군사적 충돌입니다. 6월 1일 미국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해군 함대는 강화해협에 진입했으며, 수심 측정 명목으로 손돌목에 접근했습니다. 조선은 이를 영토 침범으로 간주하고 포격을 가했습니다. 미 해군은 사과와 협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이를 정당한 군사 방어 행위로 인식하고 거부했습니다.


 교섭이 결렬되자 로저스는 회의를 소집하여 강화도 상륙작전을 계획했습니다. 6월 10일 미 해군은 초지진을 포격으로 초토화 시킨 뒤 점령했습니다. 11일에는 덕진진을 무혈 점거하고 이어서 광성보를 공격했습니다. 어재연 장군이 지휘하는 육백 명의 조선군이 광성보를 방어했으나 결국 함락되었습니다. 이때 미 해군은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기를 탈환했습니다. 


<미국 신문이 본 신미양요>

 1871년 9월 9일 미국(뉴욕) 발행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는 「THE COREAN WAR」 제목 아래 신미양요 관련 삽화를 게재했습니다. 해당 삽화들은 현장에 동행한 종군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Felice Beato)가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은둔의 나라’ 조선이 미국 대중에게 시각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그러나 신문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미 해군의 “조선원정”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삽화1] 초지진 전투
[삽화2] 광성보 전투     


 [삽화1]은 미 해군이 초지진을 함락한 직후 미국 국기를 게양하는 장면이며, ‘승리’의 순간을 극적으로 연출하고 있습니다. [삽화2]는 광성보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 병사들의 처참한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조선의 패배를 부각시킵니다. 두 삽화는 미 해군의 군사적 우월함과 조선의 무력함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조선 “정복”의 성과를 시각화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도 미 해군의 군사 행위를 합리적인 조치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선원정”의 목적을 “미국 수병 보호를 위한 협정 체결”로 정당화합니다. 이어서 “조선은 기만적인 공격(손돌목사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라며 군사 충돌의 책임을 조선에게 전가합니다. “본때를 보여주어 승복을 받아내기 위해” 라는 서술은 군사 행위가 필연적 선택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와같이 조선은 “징벌”*의 대상으로 미 해군은 ‘합리적 주체’로 묘사됩니다. 

   

* 당시 미국 언론에서는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조선에 대한 ‘응징’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하퍼스 위클리』와 같은 일자에 발행된 『레슬리 화보 신문(Leslie's Illustrated Newspaper)』의 신미양요 기사 제목은 ‘조선에 대한 징벌(The Chastisement of Corea)’이었다. 


[삽화3] 작전회의
[삽화4] 조선사절이 탑승한 조선배


 [삽화3]은 강화도 공격 직전, 미 콜로라도호에서 지휘관들의 작전 회의 모습입니다. 강화도 공격이 치밀한 전략과 이성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군사 침략을 합리적인 절차로 그려낸 것입니다. [삽화4]는 부평부사가 파견한 조선 관리들이 탄 배를 그린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미국 문물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한아름 안고 있었다”라는 내용도 서술했습니다. 이는 조선을 미개한 대상으로 상정하고 미국과의 접촉을 통해 문명화되는 과정을 암시합니다. 


 한편 같은 일자 발행된 미국의 『레슬리 화보 신문(Leslie's Illustrated Newspaper)』(1871년 9월 9일)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미양요에 대해 “해외에서 벌어진 추악하고 값비싼 전쟁놀이”라고 지적하며, 수백 명의 조선인을 희생시킨 데 비해 외교적 성과조차 얻지 못한 작전을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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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화보 신문(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1871년 9월 9일) 


 『하퍼스 위클리』와 『레슬리 화보 신문』를 통해 당시 미국의 신미양요에 대한 시선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퍼스 위클리』는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조선을 비문명적인 타자로 표상하고 서구적 질서에 의해 교화되어야 할 존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 해군의 무력 개입은 정당화되었습니다. 『레슬리 화보 신문』도 무력 침공의 본질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조선을외교적·상업적 이익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실익 없는 무력 사용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을 뿐입니다.


<신미양요 이후>

 신미양요에서 미 해군은 광성보 등 주요 방어 거점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작전 지연, 열악한 보급 여건, 그리고 조선군의 지구전 방식의 저항 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이 전쟁을 통해 실질적인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후 조선의 대외정책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전국에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했습니다. 조선의 일부 지식인층은 서양과의 군사력 격차를 실감하고, 통상 개방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신미양요의 흔적을 따라: 강화도 기행>

 인천 강화도는 신미양요 당시 미국과 조선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등 주요 장소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19세기 말 조선의 마지막 저항과 의지의 기억이 깃든 살아 있는 역사 현장입니다. 강화도를 직접 걸으며 조선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지켜낸 순간들을 생생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6월 여름의 문턱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인천 강화도로 떠나는 짧은 역사 여행을 제안합니다.


광성보 (사진출처: 강화군청)
초지진 (사진출처: 강화군청)


참고자료 

『Harper’s Weekly』 (1871.9.9.)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1871.9.9.)

김명호,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 셔먼호 사건에서 신미양요까지』 (역사비평사, 2005)

신효승, 『신미양요』 (글누림, 2021) 

이경민, 『제국의 렌즈: 식민지 사진과 만들어진 우리 근대 초상』 (산책자, 2010)

김남현·홍종규 「19세기 미국 뉴욕 언론을 통해 본 조선의 이미지」 『강원사학』, 2018

陳其松, 「19世紀西洋新聞紙から見る朝鮮印象: Harper’s Weeklyにおける辛未洋擾の写真掲載について」, 『해양도시문화교섭학』, 2015



글_권휘민(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첨부.  신미양요 삽화 


미국 신문이 그린 신미양요_1

미국 신문이 그린 신미양요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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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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