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의 영혼을 기리는 탑, 잠령공양탑
| 명칭 | 잠령공양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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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한국 |
시대 | 1926년 |
재질 | 석재 |
크기 | 높이 300, 가로 44cm |
소장위치 | 인천시립박물관 우현마당 |
<누에고치가 비단이 되기까지>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絲)로 무늬 없이 짠 직물이 명주입니다. 견사로 만든 직물을 통틀어 비단이라고 하지만 직조 방법과 무늬에 따라 종류가 다양합니다. 그 중 명주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일상적인 옷감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명주는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를 치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명주실은 누에고치를 끓는 물에 넣고 실 끝을 풀어서 얼레에 감아 만드는 것입니다. 뽕나무 심는 것부터 시작해 누에를 치고 고치에서 생사를 뽑아 비단을 생산하는 양잠(養蠶)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후와 풍토가 누에를 키워 실을 뽑아내는 양잠에 적합해 일찍부터 명주를 짰다고 합니다. 삼국,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들은 양잠을 장려했는데, 특히 조선 태종은 예법을 정하여 왕후가 궁중에서 누에를 치게 했고, 누에알을 국가에서 공급하고 고치를 개량하는 등 우수한 명주를 만드는 데 힘썼습니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대상이 된 누에>
우리나라 최초의 양잠 전담 기구인 잠업시험장은 1900년에 창설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명주는 쌀, 면화, 축우와 함께 4대 증식정책의 대상이었습니다. 총독부는 각 지역에 교육기관인 은사수산장(恩賜授産場)을 설립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1912년 3월 조선에 맞는 누에고치 품종을 개량보급하라며 각도에 원잠종제조소(原蠶種製造所)를 건설하였습니다. 또한 다수의 제사(製絲) 공장을 설립해 대량으로 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일제는 30여 년 동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명주 증산을 꾀한 결과 생산량을 2만 톤 이상으로 늘렸습니다.
<탑은 왜 설치하였나?>
명주의 생산이 늘어난 만큼 희생되는 누에의 수도 그만큼 증가하였습니다. 이에 일제는 1926년 최초로 동대문밖 용두동 선농단(先農壇, 농사의 신에게 예를 올리는 국가제사가 시행된 제단) 구역에 있던 경기도원잠종제조소에 잠령공양탑을 세워 희생된 누에의 영혼을 달래주었습니다. 사실 이런 풍습은 일본인들에게 나온 습성으로 만물에 혼령이 있다고 믿어 누에의 혼령을 위로해 뒷탈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탑을 세웠습니다. 이후 전국에서 잠령제를 열거나 공양탑이 세워지게 됩니다.
경기도원잠종제조소의 잠령공양탑 매일신보每日申報, 1926.11.25.일자
연도 | 명칭 | 원소재지 | 현소재지 |
1926. 11. 28. | 경기 잠령공양탑 | 경기 원잠종제조소(선농단) | 인천시립박물관 |
1930. 3. 30. | 경북 잠령공양탑 | 경북 원잠종제조소(달성) | 상주 함창 |
1933. 11. 27. | 함남 잠령공양탑 | 함남 원잠종제조소(함흥) | - |
1934. 11. 7. | 충북 잠령공양탑 | 충북 원잠종제조소(청주) | 한국잠사박물관 |
1935. 10. 26. | 함북 잠령비 | 함북 원잠종제조소(경성) | - |
시기미상 | 평북 잠령공양탑 | 평북 원잠종제조소(의주) | - |
1937(일자미상) | 전북 잠령공양탑 | 전북 원잠종제조소(전주) | 미나미 총독의 휘호 |
1941. 11. 11. | 잠신사(蠶神祠) | 강원 원잠종제조소(춘천) | 진좌제 거행 |
각 지역의 잠령탑 제막 연혁(출처: 민족문제연구소)
사실 우리나라에도 선농단(先農壇)이나 선잠단(先蠶壇)에서 제를 지내는 의식이 있었는데 선농제(先農祭), 선잠제(先蠶祭)라 하였습니다. 이는 왕실 의례중 하나로 한해의 농사나 양잠을 잘되길 바라는 제사인 것이지 그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누에 외에도 도살장에서 죽은 짐승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거나 실험동물들의 공양탑, 군용모피 공출에 희생된 개들을 위한 견혼비, 군용말을 위한 마혼비 등을 세웠습니다.
<시립박물관에 오기까지...>
이 잠령공양탑은 1939년 경기도원잠종제조소가 부천으로 이전할 때 함께 옮겨졌고, 해방 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인천 서구 가정동의 한 음식점 주인이 1986년 지인으로부터 전해받아 식당 마당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靈령’자를 불길하다 하여 식당 주인이 우리 박물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전면에는 ‘蠶靈供養塔잠령공양탑 皐水고수’ 후면에는 ‘大正十五年十一月建立之(대정십오년십일원건립지) 設立發起人總代(설립발기인총대) 農學博士(농학박사) 梅谷與七郞(매속여칠랑)’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글씨는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가 직접 쓴 것으로, 쌀, 면화와 함께 일제의 비단 수탈의 욕망을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령공양탑은 인천시립박물관 우현마당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인천 서구 가정동 식당 마당에 놓여있던 잠령공양탑
글_최연주(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