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십자고상 펜던트 |
국적 | 미상 |
시대 | 19세기 |
재질 | 금속 |
크기 | 너비 5.2, 길이 8.5cm |
소장위치 | 인천시립박물관 수장고 |
<외국인 묘지>
개항 이후 제물포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과 문물이 몰려드는 국제도시가 되었습니다. 외국인이 많아지며 자연스럽게 묘지가 들어서게 되는데, 외국인 묘지를 시작으로 일본인 묘지와 중국인 묘지가 각 조계 인근에 만들어집니다.
외국인 묘지는 1883년부터 매장이 이루어지다가 1894년 공식적으로 「인천외인묘지규칙」이 공포되며 북성동 1가 1번지 일대 26,400㎡(약 8,000평)의 대지에 조성되었습니다. 이들 묘지의 주인은 의료 선교사 엘리 바 랜디스(Eli Barr Landis), 인천해관의 우리탕(吳禮當), 세창양행(E. Meyer&Co.) 직원 헤르만 헨켈(Hermann Henkel), 타운센드 상사(Townsend&Co.)의 월터 데이비드 타운센드(Walter Davis Townsend), 광창양행(Bennett&Co.) 월터 베넷(Walter G, Bennett)의 아내 하나 글로버 베넷(Hana Glover Bennett) 등과 같은 인천과 인연이 깊은 개항 초기의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이후 외국인 묘지는 도시계획에 따라 1965년 연수구 청학동 산 53-1번지의 새 부지로 이전하게 됩니다. 청학동 묘지에는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등 모두 13개국에서 온 외국인의 묘지가 66기 남아있었습니다. 이 묘지들은 다시 2017년 부평의 인천가족공원 내 외국인 특화 묘역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 의사 랜디스의 십자고상 펜던트가 출토됩니다.
<닥터 랜디스>
십자고상의 주인은 한국이름 ‘남득시(南得時)’로 잘 알려진 엘리 바 랜디스(Eli Barr Landis, 1865~1898) 박사입니다. 랜디스는 미국인 의사로 선교를 위해 영국성공회 찰스 코프(Charles John Corfe, 1843~1921) 주교 일행과 1890년 인천에 도착합니다. 도착 직후부터 숙소로 쓰고 있던 건물에 진료실을 꾸려 진료를 시작하였고, 1891년 인천 최초의 서양병원인 성누가병원(St. Luke Hospital, 영국병원)에서 진료를 이어갑니다. 랜디스는 영어 이름이 조선인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낙선시(樂善施, 선행을 나누어 즐거운) 병원이라 이름짓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며 강화를 비롯한 섬지방과 충청도, 황해도, 전라도, 제주도에서도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병원을 찾았다고 합니다. 랜디스를 사람들은 ‘약대인(藥大人, 약을 주는 선한 사람)’이라 부르고, 병원이 위치한 응봉산을 ‘약대인산’이라 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랜디스는 환자를 돌보는 한편, 영어야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제물포세관 의료관으로 활동하기도 하며,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술을 베풀던 랜디스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1898년 4월 16일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십자고상 펜던트>
외국인 묘지가 청학동에서 부평으로 이장할 당시 랜디스의 묘지에서 출토된 십자고상 펜던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수난을 형상화한 것으로 청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원형 고리가 달려있어 묵주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뒷면에는 라틴어로 ‘The MISERICORDIA(자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 깊이 녹아들어 한국인들 속에서 헌신적인 의사로 살다 간 랜디스의 삶은 ‘약대인’으로 불리며 존경받아 마땅했습니다. 안타깝게 요절한 랜디스의 한국을 향한 애정과 열정적인 다양한 활동은 그가 남긴 십자고상의 ‘자비’라는 단어에 고스란히 담겨 전해지고 있습니다.
글_김윤희(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