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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유물 소개

우리나라 최초의 선물거래소 "인천 미두취인소"의 계산서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032-440-6768)
작성일
2025-08-08
조회수
99

우리나라 최초의 선물거래소 “인천 미두취인소”의 계산서

명칭

미두취인소 계산서

국적

한국

시대

1937

재질

종이

크기

가로 15, 세로 22cm

소장위치

인천시립박물관 역사 2실




<시간을 거래하는 특별한 시장>

  1896년, 인천에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라는 독특한 시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일반 시장이 오늘 필요한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라면, 이곳은 미래에 거래할 쌀과 콩의 값을 미리 정해 약속하는 시장, 즉 선물거래소(先物去來所)였습니다. 예를 들어 겨울에 쌀값이 오를 것 같으면, 미리 지금 가격으로 약속을 해두고 나중에 쌀을 주고받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가격이 급변해도 손해를 줄일 수 있어, 농민과 상인 모두에게 유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인천 미두취인소는 이렇게 ‘내일’을 사고파는, 시간 위에 세운 거래소였던 셈입니다.


인천 미두취인소의 모습


<장부에 담긴 미래의 약속>

 인천시립박물관 역사 2실에는 인천 미두취인소에서 실제 거래 내역을 기록한 계산서 1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937년 3월 13일자 계산서인데, 이 계산서에는 ‘옥취인점(玉取引店)’에서 쌀 1,000석을 4개월 기한으로 30엔, 5개월 기한으로 31엔에 매매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인천시립박물관 수장고에는 ‘옥취인점’에서 발행한 계산서  4점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전시되어있는 계산서와 비슷한 양식으로 1937년 1월~11월사이에 발행된 것입니다. 여기에도 쌀의 수량, 단가 등이 적혀있는데, 쌀 단가는 대부분 30엔 전후로 적혀있습니다. 이 계산서들을 통해 당시의 쌀 시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통지 수령인은 기호로 표기되어있어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미두취인소 계산서
옥취인점 발행 미두취인소 계산서


 <쌀 시장에서 투기장으로>

 인천 미두취인소의 설립취지는 곡식의 품질을 개선하고, 심하게 변동하는 곡식의 가격을 안정시켜 공정한 매매를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립 당시 조선은 점차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되던 시기였고, 쌀 시장 또한 일본 상인들에게 더 유리하게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우리 농민들은 점점 거래에서 밀려게 되었고, 시장은 곡물 유통의 중심지가 아니라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오사카 미두취인소와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 큰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많은 이들이 투자 실패로 재산을 잃고 삶까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천미두취인소는 쌀을 위한 시장에서, 돈을 쫓는 도박장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조선시대 미두거래의 신 ‘반복창’은 미두 시장에서 단기간에 거금을 벌어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연이은 투자 실패로 2년만에 몰락한 일화를 남기며 이 시장이 지닌 위험성과 허망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인천 미두취인소는 새로운 매매방식을 시도한 최초의 선물거래소였지만, 동시에 일제의 곡물 수탈과 경제 지배가 본격화되는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인천 미두취인소는 조선 경제 침탈의 이면에 숨겨진 잊지말아야 할 우리의 어두운 역사입니다.


인천 미두취인소 거래 모습 『일본지리풍속대계』 삽화


  

글_이정은(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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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제목
米豆取引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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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 문의처 032-440-6768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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