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국민방위군 일기 |
국적 | 대한민국 |
시대 | 1951 |
재질 | 종이 |
크기 | 규격 다양, 가로 9, 세로 14.3cm |
소장위치 | 인천시립박물관 기증실 |
인천시립박물관 3층 ‘기증자 명예의 전당’에는 고(故) 심재갑 선생이 기증한 ‘국민방위군일기(1951)’와 명찰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유물은 한국전쟁의 비극적 사건인 ‘국민방위군 사건’의 실상을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1951년 1·4 후퇴 직전, 대한민국 정부는 후방 경비와 병력 보충을 명분으로 청년들을 ‘국민방위군’으로 긴급 편성하고, 이들을 대구·부산 등 남부 지역 61개 교육대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지도부의 횡령으로 식량과 의복 등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사·병사·동사 등으로 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망자는 5만에서 8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증유물 ‘국민방위군일기(1951)’는 인천 개건너(가좌동)에 살던 17세 소년 심재갑이 제주도 훈련소에서 약 6개월 동안 겪은 일을 매일 기록한 일기입니다. 이 일기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제주도 훈련소의 참혹한 현실을 현장에서 직접 기록한 드문 사례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굶주림과 질병, 집단적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한 소년의 시선을 통해 역사적 증언으로 드러납니다.
<제주도 훈련소로 가는길>
국민방위군에 스스로 지원한 소년 심재갑은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며 “조국을 위해 죽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훈련생활은 처음부터 폭력으로 얼룩졌습니다. 훈련병들은 죄수처럼 취급되었고, 돈과 먹을 것을 빼앗긴 채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소년이 마주한 공포와 당혹감은 일기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아! 처참 그때의 그 살풍경이여!
그들의 얼굴 무슨 죄수를 취급하듯 하고 [ ]은 사람들은 마치 죽엄의 길을 걷는 [ ] 같은 절망의 얼굴이다.
[하]나 하나 뒤지는데 다른 데선 삿쓰까지 뒤진다. 누가 우물우물했다고 captain 뛰어가서 막 뛰들겨 준다.
막대기가 불어지도록, 아니 불어젓다.
무시무시하다. 나는 신분증 뺏기는 것이 안타까워서 눈치를 보아 감첫다.
삿쓰 안으[로] 가슴이 뭉클뭉클하고 얼굴이 확..
(1월 17일)
<굶주림과 질병, 죽음으로 내몰린 훈련소 생활>
일기 곳곳에는 굶주림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식사는 국 한 그릇에 안남미(베트남쌀) 한 줌이 전부였습니다. 소년은 제 돈으로 썩은 고구마를 사 먹거나,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고구마 쭉정이를 주워 먹고, 몰래 무를 캐 먹으며 허기를 달랬습니다. 때로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취사장을 기웃거리거나 사역을 나가 겨우 끼니를 이어갔습니다.
저번 사역 때 밥이 없어서 이 다음에 준다고 해서 그 사람한테로 취사장을 수상할 만치 몇 번씩 기웃기웃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그 사람한테로 가니, “무어요!” 골난 얼굴로 반장이 톡 쏜다.
그 사람 보고 “저번에 오라고 그러시더니..” 하니 “내일 오랬소? 몰라!” 뒤로 돌아 나올 때,
“자식!” 킬킬대는 소리가 난다. 무안하다. 아! 왜? 내가 이리 치사하던가? 왜 인내하지 못하느냐?
왜 남에게 구걸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던고! 어머님! 용서하세요.
다시는 그러한 치사한 짓은 안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2월 13일)
일기에는 열악한 숙소 사정도 그대로 전해집니다. 20평 남짓한 교실에 300명이 함께 생활했고, 아침이면 서로의 다리가 포개질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작은 텐트 하나에 150명이 몸을 눕혀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숙소에는 빈대가 들끓어 DDT를 뿌리며 생활해야 했습니다.
쇠약해진 훈련병들을 각종 질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가래침만 나온다. 모두들 캑!캑! 댄다”, “폐염으로 신음하는 (친구) 에게 장갑을 사주었다”, “발을 벗었더니 수충水蟲 때문에 발이 파먹이었다”라는 글귀가 곳곳에 보입니다.
일기가 남아 있지 않은 5~6월의 제주비행장 천막 수용소 생활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훗날 90세의 심재갑은 이곳을 ‘아우슈비츠’ 같았다며 회고했습니다. 시신이 너무 많아 한라산까지 옮기지 못하고 가까운 개울가에 묻었다고 합니다. 수용소 앞에서 ‘오늘은 몇 명이 죽었다’고 시신 수를 세었는데, 어떤 날에는 하루에 20명씩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주 주민들은 이곳을 ‘죽음의 수용소’로 불렀습니다.
<그리운 나의 고향 인천>
소년 심재갑은 시간이 흐를수록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일기에 남겼습니다. 밤에는 그리운 어머니와 가족들을 꿈 속에서 만나고, 낮에는 바다를 바라보며 육지로 향하는 수송선을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에는 인천 고향의 봄을 떠올리며 보초를 서다 눈물을 흘린 뒤, 그날을 ‘눈물의 하루’라고 적었습니다.
아름다운 고향의 봄은 날 불으건만 나는 언제나 기다리는 고향에 갈 것인가?
그 인천 서공원(자유공원)의 봄! 월미도의 봄! 나의 지금의 가슴은 고향의 아름다운 봄의 그리움에 울렁거리고 있다...
내무반에 들어와 담요를 뒤집어 쓰니 집 생각이 간절하며 눈물이 흘른다. 자꾸자꾸 흘은다. 귀 밑으로 줄줄 흘은다...
오늘 하루를 회고하건대, 말하자면 오늘은 ‘눈물의 하루’였다.
(3월 22일)
이후 심재갑은 6월 21일 되어서야 배를 타고 마산에 도착했고, 안동과 의성까지 화물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이후 다시 차출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친구들과 함께 도망쳐 인천 가좌동 고향까지 다리가 부르트도록 걸어 돌아왔습니다.
<책 발간, 작은 전시회, 북콘서트까지>
국민방위군일기는 70여 년 동안 고 심재갑 선생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가 2024년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이듬해 오랜 세월로 훼손된 일기는 보존처리를 거쳐 『국민방위군일기: 한 인천 소년이 겪은 6·25전쟁』 학술총서와 작은 전시회로 소개되었습니다. 12월에는 심재갑 선생의 증언을 직접 듣는 ‘북콘서트’도 열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전쟁 시기 국가의 무책임과 폭력으로 희생된 젊은이들을 다시 기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글_권휘민(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참고문헌>
인천광역시립박물관 『국민방위군일기: 한 인천 소년이 겪은 6·25전쟁』, 2025.
진실과 화해 조사위원회 「국민방위군 사건」 『진실과 화해조사보고서』 10.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