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어 세계로
한인들의 이주는 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시작인 1902년 미국 하와이 이민 이전인 19세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한말의 불안한 정세와 계속되는 가뭄으로 한인들은 국경을 넘어 현재 중국과 러시아 땅인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이 1875년에 청나라 발상지인 만주지역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 지역으로의 한인들의 이주 및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자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의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한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연해주 지역에도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이주가 진행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인들의 일본 이주도 본격화되었다. 일본 이주는 초기 유학생을 시작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농민, 노동자들의 이주가 이어졌다. 한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일본은 70만 명이 넘는 한인들을 강제동원하여 일본 국내 뿐 아니라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중국, 러시아, 일본, 사할린 등 한반도 주변 지역으로의 이주가 본격화 된 가운데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 정권의 한인 이주 정책으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로 이송되면서 한인들의 거주지는 주변국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확장되었다.
한편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중남미와 독일 등지로 이주가 이루어졌다.
중남미 이주는 1905년의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의 이주가 그 시작이다. 이후 멕시코의 혼란을 피해 1921년 쿠바로의 이주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때의 이주는 일제강점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지속되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중남미 이주가 이루어진 것은 1962년 이후이다. 새로운 일터를 찾아 브라질과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지로 이민이 이루어졌다.
독일 이민은 1960년대 광부와 간호사의 파견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당시 서독은 경제성장과 함께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우리는 외화부족과 실업의 대책으로 광부,간호사, 조선기술자 등 많은 인력들을 파견하였다.
아울러 3전시실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이민이라 할 수 있는 해외입양과 관련하여 그 원인과 상황, 인천지역의 역할을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