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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일정

인천시립극단 제79회 정기공연 <거대한 뿌리>

750거대한뿌리 포스터(고화질)
인천시립극단 제79회 정기공연 <거대한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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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립극단 창작극 프로젝트 네번째 작품

예술감독 강량원
작연출 박근형


시인 김수영의 자우와 꿈

거대한 뿌리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2019.8.31~9.8
평일 오후 2시, 주말 오후 3시
청소년들을 위한 특별한 공연
- 인천시립극단 정기공연<巨大한 뿌리> -

인천시립극단은 3월에 선보였던 인천시립예술단 합동공연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에 이어 정기공연<巨大한 뿌리>를 준비하여 인천 시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작년 한 해는 인천을 주제로 창작극을 개발하여 시민들과 함께 만들고 나누기 위해 노력하였다면, 2019년에는 역사의 사실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준비된 작품을 준비하려고 한다. 이번 작품은 인천시립극단과 극작가겸 연출가인 박근형교수와 함께 공부하면서 이뤄낸 노력의 성과로 올 한 해 동안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진정한 연극을 자신 있게 선보이는 것이다.

제79회 정기공연인 <巨大한 뿌리>는 3·15 부정선거부터 4·19혁명을 배경으로 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사건을 통하여 김수영 시인의 삶의 여정과 그의 문학을 통해 굴절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무대 위에서 그려냄과 동시에 지금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세대 간, 지역 간의 진통과 청산되지 못한 그릇된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연극 <巨大한 뿌리>는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지만 그것은 바로 가슴 벅찬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시대를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어느새 우리 시대를 돌아보고 지금의 문제를 해결해나갈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문화를 통하여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감과 동시에 미래의 모습까지 그려볼 인천시립극단의 연극 <巨大한 뿌리>를 자신 있게 관객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특히 이번공연은 평일에 한하여 청소년들을 위해 공연관람 후 공연장 무대와 분장실등 공연 후 배우들의 모습을 직접 견학할 수 있도록 체험프로그램을 만들어 청소년들의 문화 활동에 도움을 주고자한다.  

공연은 8월 31일(토)부터 9월 8일(일)까지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열린다. 
문의 032)420-2790


작품소개
  

시인 김수영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이승만 독재정권과 4·19혁명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초지일관 자유를 노래해 왔다.
한국의 시인,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 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자유를 불가능케 하는 시대와 여건에 대해 절규하며 살아왔다.
그의 삶의 여정과 시인의 문학을 통해 굴절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무대 위에서 그려보고자 한다. 더불어 지금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세대간, 지역간의 진통과 청산되지 못한 그릇된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김수영 시인의 ‘巨大한 뿌리’ 또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문에 대한 자답, 그리고 그런 자문자답은 이 작품의 첫머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가 암시하듯이 끊임없는 자기 정체성 재확인하는 시이다.

巨大한 뿌리 -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 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 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거리를 활보하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 번도 장안 외출을 지금까지 하지 못 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아직도 서로가 옳다고 싸움하고 있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손가락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 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 하면…… 

-<巨大한 뿌리> 전문-







줄 거 리

1968년 6월 15일 늦은 저녁,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김수영은 교통사고로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후송된다.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쓰고 그렁그렁 가래 끓는 소리만 들릴 뿐, 김수영의 의식은 희미하다. 
가족과 친지들이 수영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하나둘씩 병원에 모여 들었다.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수영은 지나온 48년의 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일본 유학을 통해 배웠던 연극의 비판정신과, 귀국 후 아내 김현경을 만나 살았던 곡절 많았던 결혼생활, 그리고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과의 애증의 관계, 6.25 전쟁과 포로수용서의 참혹한 경험, 그 모든 격동의 세월을 겪어온 자신이 이제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다니... ... ...
죽음을 눈 앞에 둔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세월이었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에 맞서 시위를 하던 김주열학생이 최류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 바다에 떠오르자 시대와 반역의 세월에 분노하며 울분을 토했던 1960년은 자신의 인생에게 가장 뜨거웠던 인생의 황금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매일 동료 문인들과 문학의 현실참여를 고민하며 격렬한 논쟁의 나날이었다. 꿈에 그리던 4.19를 맞이하여 이승만이 물러가고, 김수영은 신새벽의 대한민국을 꿈꾸며 얼마나 많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었던가.
그 후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문학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수영. 
그러나 4.19이후 민주정부의 새로운 대한민국이 건설되기를 꿈꾸었으나
박정희의 쿠테타로 다시 겨울공화국으로 전락한 세상을 얼마나 조롱했던가.
김수영은 부정한 시대를 한탄하며 시를 무기삼아 세상과 맞서 보았지만 언제나 역부족인 자신을 얼마나 학대했던가.
다음날, 1968년 6월 16일 의사는 김수영의 산소 호흡기를 제거한다.
오열하며 조사를 읽는 벗들과 가족을 남겨둔 채 김수영은 저세상으로 향한다.
그이 다음 날 아침 적십자병원에서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 앞에, 그날 4.19때 거리를 뒤덮었던 한 무리의 고교생들이
자유를 외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를 따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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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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