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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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특별전시
○ 제목: 사할린 한인의 망향가 ○ 장소: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전시실 ○ 기간: 2015. 9. 21. ~12. 31. ○ 전시 구성 - 1부. 이산의 시작, 강제동원 - 2부. 민족 정체성을 지켜온 한인들 - 3부. 귀국을 위한 노력 - 4부. 영주귀국, 그리고 또 다른 이산 - 5부. 친구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동원 되어 사할린에 배치되었던 사람들과 후손들을 사할린 한인Сахалинсий Корееец라 부릅니다. 대부분이 남한출신인 한인들은 해방을 맞았으나 일본, 소련은 물론 조국의 무관심 속에 타향에 방치되었습니다. 귀국의 꿈을 위해 소련국적을 거부하고 무국적자로 남은 한인들은 우리 민족 특유의 성실함과 교육열로 차별과 멸시를 극복하면서 사할린의 두 번째 민족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사할린 한인의 이주역사는 반복되는 이산이 특징입니다. 강제동원에 의해 고향의 가족들과 첫 번째 이산을 했고, 패망을 목전에 둔 일제가 큐슈지방으로 한인 3,000여명을 전환 배치함으로써 사할린의 가족과 두 번째 이산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1945년 이전 출생자와 배우자에 한정된 영주귀국으로 4,300여명의 1세대들의 가족과 헤어져 세 번째 이산을 겪고 있습니다. 2015년은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한 지 70주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지 25주년이 되는 해 입니다. 또한 한일간 협의가 없으면 일본정부의 영주귀국 지원이 종료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인하대학교 교육연구소 다문화교육융합연구사업단과 공동으로 사할린 한인들의 이주역사와 영주귀국자들의 삶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이번 “사할린 한인의 망향가” 특별전은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이산의 시작, 강제동원 193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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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1
- 담당부서
- 한국이민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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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특별전시
○ 제목: 황무지에서 지켜낸 민족혼 ○ 장소: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전시홀 및 강당 ○ 기간: 2014. 9. 1. ~ 2015. 1. 31. ○ 전시 구성 - 1부. 모국어와 민족문화의 전파자 고려극장 - 2부. 모국어와 민족 얼의 지킴이 고려일보 - 3부. 알마티 문화 사인방 - 4부. 친구들 소련 붕괴이후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고려인이라 부릅니다. 연해주로의 최초의 이주는 1864년 14가구가 지신허강 인근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로 150년이 되었습니다. 현재 까레이스키로 불리는 한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약 50만명 살고 있습니다. 1937년 소련이 연해주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후 고려인들은 황무지를 개척하면서도 한민족의 얼과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고려극장과 고려일보였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기념하면서 다음과 같이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모국어와 민족문화의 전파자 고려극장 모스크바영화대학 망명유학생 출신으로 고려인 문학 2세대를 선도하였던 한진, 고려사람 관련 다큐와 극영화를 제작하여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송 라브렌찌, 고려인가요 채집과 함께 카자흐스탄에 재즈를 처음 도입하였던 음악가 한 야꼬브 등 3인의 자료를 통해 그들이 희곡작가로, 악단장으로 재직하였던 「고려극장」을연출한다. ■2부. 모국어와 민족 얼의 지킴이 고려일보 고려사람들에게 문맹퇴치와 교육, 문화의 발전과 농업기술 등을 제공하여 왔던 고려일보사, 모스크바에서 원동까지 고려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온 안 빅토르, 1992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고려일보 기자로, 시인으로,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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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1
- 담당부서
- 한국이민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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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특별전시
○ 제목: 자이니치 학교들-재일 한인 민족교육 ○ 장소: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전시홀 ○ 기간: 2013. 6. 13. ~ 10. 30. ○ 전시 구성 - 1부. 해방과 민족학교 - 2부. 한 민족, 두 학교: 한국학교와 조선학교 - 3부. 배움을 위한 투쟁 - 4부. 계속되는 노력 - 에필로그 일본에는 현재 약 54만 5천 명의 우리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온 유․이민들과 태평양 전쟁 수행을 위해 강제 동원되었다가 해방 뒤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일본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과 그 후손이다. 해방 직후 그들은 조국으로의 귀국을 희망하며 일본어밖에 할 줄 모르는 자녀들을 위해 ‘국어 강습소(國語講習所)’를 열어 민족 교육을 시작하였다. 식민 통치의 본산이었던 일본에서의 민족 교육은 순탄치 않았으나, 민족 교육은 기존의 민족 학교뿐만 아니라 민족 학급, 한글 교실 등의 새로운 형태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재일 한인 사회의 민족 학교 설립과 일본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 교육을 지켜왔던 과정들을 소개하고, 일본 한인 사회가 민족 교육을 통해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개최하였다. ■ 1부. 해방과 민족학교 일제 강점기에 건너왔던 재일 한인의 자녀들은 일본의 동화 정책에 따라 일본인 학교에 다니면서 ‘일본 제국의 신민, 천황 폐하께 충성’이라는 내용의 황민화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한인들은 한반도와 가까운 항구로 빠르게 몰려들어 귀국을 준비하였고 귀국에 대비하여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600여 개에 달하는 ‘국어 강습소’가 일본 각지에서 열렸다. 그러나 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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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13
- 담당부서
- 한국이민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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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특별전시
○ 제목: 젊음,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다-파독 광부, 간호 여성 이야기 ○ 장소: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전시홀 ○ 기간: 2012. 6. 13. ~ 11. 30. ○ 전시 구성 - 1부. 파독의 과정 - 2부. 파독 광부 - 3부. 파독 간호사 - 4부. 광부・간호사 단체 - 5부. 독일마을 - 에필로그 1960~70년대, 대한민국의 젊은 광부, 간호 여성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과 더 나은 삶을 찾아 각각의 사연을 품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봉급의 2/3 이상을 한국으로 송금하였고 이는 국내 경제 성장을 위한 종자돈이 되었습니다. 50여년이 지난 오늘, 그들 대부분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북미 등 세계 각지에서 재외 한인사회 형성의 주역으로서 자랑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지난 몇 년간 독일 현지 출장 등을 통해 수집한 광부, 간호 여성들의 다양한 자료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여 그들의 삶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1부. 라인강의 유혹 (파독의 배경) 1960년 말 6·25전쟁 이후 한국의 실업률 해소와 외화 획득의 필요성,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한 부족한 노동 인력 공급과 전후 복구 지원, 그리고 경제 원조라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광부 약 8천여 명과 간호 여성 약 1만여 명의 독일행이 이루어졌다. ■ 2부. 글뤽 아우프(Glück Auf) (광부들의 생활) 파독 당시 광부의 선발 조건은 20세~35세 남성으로 1년 이상 탄광 근무 경력이 있는 자였으나 실제로 광부 경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독일에 도착한 광부들은 광산 현장에 투입되기 전, 몇 단계의 사전 교육을 받고 채탄부, 굴전부, 잡부 등으로 나누어져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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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13
- 담당부서
- 한국이민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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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특별전시
○ 제목: 동방을 밝힌 등불,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 장소: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전시홀 ○ 기간: 2011. 6. 10. ~ 8. 7. ○ 전시 구성 - 1부. 이상향, 명동촌의 형성과 정착 - 2부. 명동의 5현 - 3부. 명동촌의 생활문화 - 4부. 명동학교 - 5부. 명동교회 - 6부. 명동촌 사람들 - 7부. 북간도의 항일독립운동 - 에필로그 명동촌은 1899년에 김약연을 비롯한 다섯 가문이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로 이주하여 세운 한인마을이다. ‘동쪽(한반도)을 밝힌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국 광복을 밝히는 등불을 자처하며 명동학교를 건립하여 민족주의교육 실시 및 항일운동가들을 양성하였던 곳이다. 이번 특별전은 지금까지 발굴된 초기 한인이주 및 명동촌 형성과정 관련 자료뿐 아니라 최근의 명동촌 모습과, 명동학교 재건 모습 등을 전시하여 명동촌 한인선조들의 열정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개최하였다. ■ 1부. 이상향, 명동촌의 형성과 정착 1800년대, 두만강 변의 함경북도 농민들은 산으로 둘러싸인 척박한 땅으로 인해 농사 짓기가 힘들자 두만강 저편의 비옥한 땅인 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99년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김약연(金躍淵)을 비롯해 총 5가문 142명 모두가 평등한 이상적 공동체 마을을 건설하려는 꿈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넜다. 이들은 장재촌 지역에 자리를 잡고 황무지를 개척하여 가옥을 건설하고 서당을 세웠다. 이후 김약연은 장재촌, 윤하연과 문병규는 용암동, 남위언은 중영촌, 김하규는 대룡동에 각각 정착하여 마을을 발전시켜 나갔다. ■ 2부. 명동의 5현 명동촌을 일군 다섯 가문의 지도자(김약연, 김하규, 남도천, 문병규, 윤하현)들은 명동의 5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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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10
- 담당부서
- 한국이민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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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특별전시
○ 제목: 또 다른 삶의 울림-낯선 땅, 낯선 생활 ○ 장소: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전시홀 ○ 기간: 2010. 6. 10. ~ 8. 8. ○ 전시 구성 - 1부. 사탕수수 노동자의 삶 - 2부. 에네켄 노동자의 삶 - 3부. 독일 노동자의 삶 이번 특별전은 먼 타국에서 피부색의 차이로, 문화의 차이로, 언어소통의 부재로 인해 받았을 수많은 차별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정착한 우리 선조와 동포들이 이룩한 삶과 그 속에 담긴 애환을 사진과 관련유물을 통해 되새겨 보고자 개최하였다. ■ 1부. 사탕수수 노동자의 삶 구한말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던 국내의 생활고와, 노동집약적인 사탕수수 농업에 노동력이 필요해진 하와이 내부 사정에 의해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약 7,400여 명의 우리 선조들이 하와이 이민을 떠났다. ‘루나’의 감시와 뜨거운 햇빛 아래서의 농장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달팠으며, 농장에서의 규칙적인 생활과 낯선 제도의 압박감 또한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 2부. 에네켄 노동자의 삶 1905년, 새로운 삶을 찾아 1,033명의 한인들은 인천 제물포를 출발하여 낯선 멕시코로 향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 이민 중개인에 의해 단 한차례로 끝난 대규모의 불법 노동이민이었으며, 그들을 맞이한 것은 유카탄의 뜨거운 불볕더위와 난생 보지도 못한 에네켄 밭이었다. 각 농장에 배치된 한인 노동자들은 형식상의 계약 노동자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채무 노예나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 ■ 3부. 독일 노동자의 삶 1960년대 초 한국정부는 늘어나는 실업률 감소와 독일의 선진 기술 및 외화획득을 위해 1963년~1977년까지 광부 7천 936명, 1966년~1976년까지 간호사 1만 723명을 독일에 파견했다. 당시 독일로 떠난 광부와 간
- Date
- 2010-06-10
- 담당부서
- 한국이민사박물관
- 자료관리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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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당부서 한국이민사박물관
- 문의처 032-440-4708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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